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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질 피해자가 공갈범이 되는 나라

    하태훈 교수 (고려대 로스쿨)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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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법이 지배하는 나라다. 형사처벌이 최우선이자 유일한 수단인 것처럼 남용되고 있다. 분쟁이 일거나 사고가 나면 으레 형법에 기댄다. 일단 고소나 고발을 하고 본다. 그러면 피해자는 가만히 있어도 국가가 형벌권을 발동하여 수사도 하고 증거도 수집해 재판으로 마무리 해준다. 그러니 형법에 기대는 것이다. 형법학자로서 형법이 여기저기 자주 등장하니 기분 좋은 일이여야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형법은 나서지 말고 다른 수단으로 해결이 가능할 때까지 뒷전에 물러나 있어야 한다는 형법의 기본성격에 반하기 때문이다. 침해된 공존질서를 다른 수단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면 형법규범이 나설 필요는 없다. 이것이 형법의 최후수단성이다(ultima ratio). 그래야 과잉금지의 원칙에도 부합한다. 


    과잉형사범죄화 경향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표현의 자유와 집회·시위의 자유를 옥죄기 위한 과잉수사와 기소가 시발이다. 무죄판결을 받더라도 시민을 위축시키는 효과를 얻기에는 형벌만큼 강력한 수단은 없다. 그래서 형법의 과잉이 신경향처럼 자리 잡은 것이다. 민사로 해결될 문제에 형법을 들이댄 경우도 허다하다. 카드대금을 결제하지 못하면 사기죄로 고소하는 신용카드회사가 대표적이다. 형사처벌의 위협으로 카드빚을 갚게 하려는 신용카드사의 기획에 국가형벌권이 동원되는 꼴이다. 자동차산업의 불공정 거래행위도 마찬가지다. 자동차산업 발전에 기여한 중소기업들이 대기업과 원청업체의 불합리한 단가결정 등 갑질에 시달리다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이 그렇다. 부도위기의 한계상황에 몰린 하청업체가 원청업체의 갑질에 따른 손실보전 차원의 자금지원 또는 경영권 인수를 요청하고 원청업체가 이를 받아주지 않으면 부품공급을 중단하겠다는 통보에 대기업과 원청업체가 공갈죄로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을의 눈물을 공갈죄로 옭아매는 신종 갑질로 대기업의 협력업체는 하루아침에 범죄자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하청업체들은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기껏해야 채무불이행에 불과한 행위에 국가형벌권이 악용되는 또 다른 현실이다.

    새해 들어 공정경제가 다시 화두다. 대기업과 원청업체의 갑질은 그대로 두고 그 갑질의 피해자만 울리는 국가는 경제민주화와 공정경제를 말할 자격이 없다. 재벌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린다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은 차별이자 불평등을 초래한다. 수많은 전속거래 업체들이 원청업체의 불합리한 납품단가 결정과 설비투자 강요 등으로 적자 발생이 불가피한 구조가 근본원인이다. 자동차나 반도체를 생산하는 몇몇 재벌 대기업이 산업과 경제의 근간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불공정 거래행위에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 고질적인 불공정 하도급행위를 근절하지 않고는 협력업체는 노예가 되고 공갈죄까지 내몰리는 악순환은 반복될 것이다. 상하 수직적 피라미드 구조에서 상생하는 수평적 구조로 제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 우선이다. 형법의 무기인 형벌은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거나 제한하는 가혹성 때문에 민사상 손해배상이나 과태료·과징금 같은 행정벌로 해결될 수없는 경우에만 투입되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형법의 과잉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하태훈 교수 (고려대 로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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