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egalinsight
  • Legaledu
  • 법률신문 오피니언

  • 상시채용
  • 기사제보
  • 서초포럼

    Resident Evil

    백강진 재판관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ECCC)) 입력 :
    글자크기 : 확대 최소
  • 인쇄
  • 메일보내기
  • 기사스크랩
  • 스크랩 보기
  • 155322.jpg

    지난 8월 4일, ECCC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누온 치아(Nuon Chea, 93세)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누온 치아는 크메르루즈의 2인자로서, 2016년 1차 재판에서 인도에 반하는 죄(Crimes against humanity)로 이미 종신형이 확정되었고, 집단학살(Genocide)이 포함된 2차 재판의 항소심을 앞두고 있던 중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에 이르렀다.

     

    시장경제와 종교 등 계급 불평등을 초래한 기존 제도를 모두 폐기하고, 캄보디아 농민으로만 이루어진 순수 사회를 꿈꾸었던 크메르루즈의 이론적 기반과 실행 계획을 정립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모든 공소사실이 외세에 의해 정치적으로 조작된 것이라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강하게 주장하여 왔다.

     

    크메르루즈 치하에서 캄보디아 인구의 3분의 1에 가까운 170만명가량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기간의 내전과 국제 협상을 거쳐 ECCC의 설립이 수십 년 후에야 이루어진 까닭에, 관련자들 다수가 이미 사망하였거나 재판 또는 수사 도중 사망하여 버렸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크메르루즈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반면, 대다수 피해자들은 아직도 가해자들이 떳떳하게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등 ECCC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계속되고 있다.

     

    그의 사망 이후 수많은 기사와 평론이 이어졌고, 이번에도 어김 없이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에서 발견하였다는 그 ‘평범성’의 내용은,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없는 사유의 부재’였다. 자신의 사형집행 직전에도 타인의 장례식에나 어울리는 상투적인 조사(弔辭)를 말할 정도로 표준화되고 관료적인 행위규칙에만 매달려 악을 일상화하였다는 것이다.

     

    ECCC의 첫 피고인이었던 ‘Duch’는 툴슬랭 감옥의 소장으로서 약 1만 5000여명을 고문하고 살해한 후 꼼꼼하게 사진과 기록을 남김으로써 ‘살인기계(Killing machine)’라는 악명을 얻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 수용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프랑스 인류학자 프랑수아 비조(Francois Bizot)는 ‘더 게이트(The Gate)’라는 책을 통해 교사 출신인 ‘Duch’의 인간적이고 지적인 면을 부각하였다.

     

    친일문제 전문가 윤덕한은, 이완용 평전의 집필을 준비하던 중 그가 한때 독립협회의 창설멤버이고 미국 주재 초대 조선 공사관 멤버 중 유일하게 제 역할을 한 인물이었으며, 학부대신으로 최초의 의무교육을 도입하는 등 조선왕실에 충성한 유능한 관료이자 애국자였던 사실을 발견하고, 집필을 계속해야 하는지 망설였다고 토로한다.

     

    국제형사재판은 관련 기록 등이 풍부하여 사실인정에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나, 복잡한 정치·사회적 문제가 얽힌 분쟁에서 사실관계와 이에 따른 개인의 형사책임 여부를 확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며, 개인의 선악 여부를 기준으로 이를 판단하는 일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다만, 뚜렷한 사회 불평등, 희소 자원, 과열 경쟁, 성공에 대한 압력 등의 상황에 처한 인간의 본성은, ‘배제(ausgeschlossen)’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인정받기 위해서나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악을 행할 준비가 돼 있다’는 신경생물학자 요아힘 바우어의 통찰은, 대체로 ‘선했던’ 어느 개인의 일탈 행위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백강진 재판관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ECCC))

    최근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