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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의 평온

    정성민 판사 (사법정책연구원)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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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처럼 국제정세가 뜨거울 때면 어떤 피의자가 생각난다. 판사로 재직하며 만난 당사자 중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다. 만약 그때 그를 구속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할까. 보다 평온해졌을까?

     

    영장실질심사 전 기록을 보고 보통 사건이 아닌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글로 적힌 신문조서이지만 피의자의 고고한 태도와 말투가 눈에 훤하였다. 그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피의자는 생면부지의 타인을 칼로 찔렀다. 목을 노린 칼은 다행히 빗나갔다. 살인미수 범행임에도 뚜렷한 동기를 찾을 수 없었다.

     

    심문실 앞에서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심문실 안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 한 명, 피의자만 빼고. 경찰이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그는 굳은 표정을 지으며 기립을 거부하였다. 피의자 신분이지만 겨우 일개 지방법원 판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냥 두세요. ○○○ 피의잡니까?”

     

    피의자는 처음부터 반말이었다. “내 뭐 하나 물어봅시다.”


    “물어볼 시간은 따로 줄 테니까 일단 제가 묻는 말에 대답하세요.”

     

    “에이씨, 그러면 나 아무 말도 안 해!” 그러면서 회전의자를 돌려 측면으로 돌아앉았다.

     

    눈앞이 하얘지고 혈압이 오르며 사고력이 저하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마음을 다잡고 다시 절차를 진행하였다. 진술거부권을 고지하고 인적사항을 물었으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의자, 지금 긴급체포돼서 구속영장이 청구됐는데, 어떤 범죄사실로 영장이 청구됐는지 알고 있습니까?”

     

    피의자가 입을 열어 다시 같은 말을 했다.

     

    “그 전에 나 뭐 좀 하나 물어봅시다.”


    판단력이 흐려진 나는 말려들었다. “예, 물어보시죠.”


    “대한민국 헌법과 60억 지구 인류 중에 어떤 게 더 중요합니까?”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연수원 시험도 저렇게 어렵지는 않았는데.


    “음, 쉽게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군요.”


    얼렁뚱땅 무마하려는 내게 피의자가 불호령을 내렸다.

     

    “넌 그것도 모르냐? 초등학교는 나왔냐? 나 이제 너랑 얘기 안 해!”

     

    그 후로 다시 말을 않는 피의자를 앞에 두고 간신히 심문을 마쳤다. 사무실로 돌아와 좀 있으니 결재를 위해 심문조서가 올라왔다. 피의자는 조서 말미에 멋들어지게 서명을 하였다. 경찰 피의자신문조서에서 봤던 그 서명이었다.

     

    ‘지구방위군 총사령관’



    정성민 판사 (사법정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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