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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와 업 쌓기

    천경훈 교수 (서울대 로스쿨)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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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변호사로부터 들은 얘기다. 갑설과 을설이 대립되는 민사사건에서 파워포인트를 띄워 놓고 갑설이 옳다고 열심히 설명하고 들어왔더니, 상대방이 화면에 인물사진 한 장을 띄우더란다. 사진의 주인공은 A와 같은 로펌에 근무하는 저명한 B 변호사. 뒤이어 B가 을설을 지지한 여러 논문을 보여준 뒤, 상대방은 말한다. '원고 대리인의 동료 변호사들도 피고 주장이 옳다고 오래 전부터 인정해 왔습니다. 지금 "원고 대리인은 직장 동료들도 동의하지 않는 독단적 견해를 펼치고 있을 뿐입니다." 씩씩거리며 사무실로 돌아온 A는 대표변호사를 찾아가 B가 논문 좀 그만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는데, 뒷일은 듣지 못했다.

     

    한번 쓴 글과 내뱉은 말은 언제 어디서 스스로를 (심지어 직장동료를) 옭아맬지 모른다. 특히 의뢰인의 처지에 따라 다른 주장을 펼칠 필요가 있는 변호사로서는 특정한 견해를 논문으로 남기는 건 조심해야 한다. 오늘 내가 논문에서 펼친 주장이 내일 상대방의 칼날이 되어 나를 벨지도 모르니. 그래서 변호사들은 논문을 쓰더라도 본인의 주장은 감추거나 두루뭉술 처리하곤 한다.

     

    변호사를 그만 두고 학계로 오니 그런 걱정 없이 소신대로 글을 쓸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세상에 고정불변이란 없는 법이어서, 읽고 궁리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심혈을 기울여 쓴 글이지만 나중에 보면 자신이 없거나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쓴 논문의 숫자가 늘어갈수록 내가 어디에 무슨 주장을 흘리고 다녔는지 가물가물할 때도 있다. "그거 천 교수가 권리 인정해야 한다고 썼잖아. 상대방이 서면에서 인용하던데." "내가? 언제?" 이러다보면 글쓰기도 업을 쌓는 행위임을 자각하게 된다. 

     

    학자들의 대처 방식은 다양한 듯하다. 어떤 분은 늘 모호하고 조심스럽게 논문을 써서 모두들 자기편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일이관지(一以貫之) 본인의 색채가 뚜렷한 논문을 쓰고 생각을 바꾸지 않는 분도 있다. 생각이 바뀌면 "이번에 改說했다"고 각주에 선선히 밝히는 분도 있다. 물론 논문 따위는 거의 안 쓰는 분도 있다. 

     

    어떤 것이 최선인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는 겸손함이 아닐까. 이 글로는 또 어떤 업을 짓는지 조심스럽게 퇴고를 하게 된다.

     

     

    천경훈 교수 (서울대 로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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