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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쓴 책] '어떤 양형 이유'

    당사자들의 고통과 판단하는 자의 고뇌와 번민

    박주영 부장판사 (울산지법)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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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률신문 ‘내가 쓴 책 코너’에서 훌륭한 법조인들의 주옥같은 책 소개를 선망의 눈으로 보곤 했습니다. ‘언젠가 이 코너에 내 책도 올라가면 정말 좋겠군, 늘그막에 자비 출판한 뒤 법률신문에 떼를 한 번 써 볼까?’ 상상도 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생깁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필진을 구하는데 애를 먹은 것으로 보이는 법률신문 모 기자의 칼럼 청탁에서 비롯됐습니다. 당시 미국 연수를 눈앞에 두고 있던 때라 "연수 마치면 생각해봅시다"라고 잘 빠져나갔는데, 1년 뒤 돌아왔을 때 그 기자가 글쎄 그걸 기억합니다.

    1,000자쯤 되는 짧은 칼럼인데 이게 뭐라고 피를 말립니다. 어지간한 판결문 하나 쓰는 품이 듭니다. 그래도 꾸역꾸역 여섯 꼭지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또 이게 뭐라고 마지막엔 슬슬 재밌어집니다. 내심 연장 제의를 기대하며 글감까지 구상했으나 6개월 만에 교체됐습니다. 후속 필진의 면면을 보니 수긍됩니다. 법률신문 칼럼의 수준은 역시 높습니다. 칼럼 기고가 기억에서 사라져 갈 무렵 출판 제의가 왔습니다. 욕심이 나 덜컥 승낙했지만 과욕이었던지 바로 고비가 찾아오더군요. 일에 쫓기고, 글은 안 나가고, 또 어떨 땐 너무 잘 나가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낙장불입을 자책하다, 글빚을 감당할 수 없어 파투를 놓고 판을 엎을 궁리를 할 무렵, 칼럼을 읽고 출판 제안을 한,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편집자가 한 마디 툭 던집니다. "어떤 글은 사람의 마음에 닿아 다정한 자국을 남긴다"나요. 아시다시피, 법률가의 말과 글은 폭처법상 ‘흉기’ 이상 아닙니까. 국가권력을 등에 업은 공소장이나 판결문은 그야말로 사람들 가슴에 시뻘건 주먹자국을 쿵쾅 남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정한 자국이라뇨. 독을 독으로 다스리듯, 글로 준 상처를 글로 치유해 보라는 그 말에 결국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형사재판을 오래하며 전형적인 양형의 이유가 식상했습니다. 아니, 지겨웠다기보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똑같은 사건이 없듯, 법정에 선 당사자의 고통과 눈물 역시 제각각의 색조를 띠는데, 이를 판에 박힌 몇 마디 말 틀 안에 욱여넣는 것이 뭔가 부조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마음이 이끌린 몇몇 사건의 양형 이유에서, 주제넘게 문학적 표현이나 감성적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게 어떤 분들에겐 특이해 보였나 봅니다. 이 책은 형사재판을 할 때 썼던 양형의 이유 중 기억에 남는 사건 몇 개를 추려 살을 붙이고, 그간 변호사로, 판사로 겪었던 여러 사건을 처리하며 품었던 상념을 풀어놓은 것입니다.

    판결문이라는 비정한 서사, 이 장르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당사자들의 고통과 판단하는 자의 번민을 담아 보려 했습니다. 이 책으로, 판결의 형식을 빌려 사람들 마음에 시퍼런 멍자국을 낸 그 흉기 같은 글의 업보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고맙습니다.


    박주영 부장판사 (울산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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