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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굴레

    박지연 판사 (서울고등법원)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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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관계의 지배를 받고 있다. 거미줄처럼 얽혀진 그 속에서도 정작 몇 개 안 되는 가닥만 겨우 부여잡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것만 잡고 있기도 때론 버겁다. 그 중 13살의 우리집 그녀는 나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내 삶은 물리적으로는 상당 부분이 서초동 일대에서 이루어지지만, 물리적 세상 너머에서는 온전히 우리집 그녀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생각한다. 나는 나로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집 그녀로서 살고 있는가.

     

    그런데 나로서의 나만 두고 보더라도, 나는 하나가 아니다. 현재 하루 24시간 기준으로 나는 상당 부분이 판사로 여겨지고, 기대되는 직업적 전문성과 윤리성을 가졌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그 판사가 나인가? 그마저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보여지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 나인 건 분명하다. 그리고 내가 또 있다. 우리집 그분이 어쩌다 상대적으로 많은 돈을 입금해 주시는 달이면 아주 잠시지만 그분에게 굽신거리고, 우리집 그녀가 어쩌다 백점이라도 받아 오는 날이면 이 세상 모든 허물이 용서될 만큼 너그럽고 그처럼 낙천적일 수가 없다. 

     

    판사로서의 나는 훈련되어진 나이고, 우리집에서의 나는 그냥 나이다. 그렇다면 누가 진짜 나인가? 보통은 내가 두 개라 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판사인 나는 서초동 일대에서만 살고, 또 다른 나는 우리집 일대에서만 살면, 들킬 염려가 별로 없다. 그런데 닮은 듯 다른 두 개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는 시험에 들게 된다면, 부끄럽지만, 나는 그냥 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계속 훈련하면서, 훈련되어진 모습으로만 평생 살아갈 자신이 없다. 더욱이 인정하지만 슬픈 진실은, 서초동은 나 하나 없다 해도 표도 안 난다. 그런데 우리집은 바로 표 난다. 

     

    그리고 나를 정복한 우리집 그녀에게는 어찌할 것인가. 나는 그녀에게 종속되어 그녀에 의해 일희일비하지만, 알고 보면 내가 스스로 그녀 안으로 들어갔을 뿐 그녀가 나를 종속시킨 적은 없다. 기꺼이 쓴 사랑의 굴레를 이제 와서 벗을 수는 없지 않은가.

     

     

    박지연 판사 (서울고등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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