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서면을 쓰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의뢰인으로부터 사건 설명을 들은 후 나름대로 자료를 확인하고, 거기에 맞는 판례도 찾아야 하는데, 그 속에 한 사람의 삶과 인생까지 녹아 들어야 한다. 인고의 시간 끝에 서면이 완성되면 온 몸의 기가 빨려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한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파우스트 박사는 무한한 지식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이 순간 우리는 모두 파우스트가 된다.
변호사는 슬픈 천명이다. 그를 대신하여 고민하여야 하고, 그녀를 대신하여 분노도 해야 하며, 가끔은 그들 대신 혼도 나야 한다. 하루는 24시간인데, 회의하고 접견하고 재판에 출석하고 조사에 참여하다 보면 정작 서면 쓸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하나의 사건만 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 사건을 하면서 저 사건 걱정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밤에 퇴근을 하게 된다. 이렇듯 우리는 변호사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서면을 써 내려간다.
변호사에게 중요한 것은 서면의 ‘질’보다는 ‘속도’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서면이라도 기한을 놓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속도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아무래도 영장실질심사인데, 구속영장청구서를 입수한 후 하루 이틀 내로 50페이지가 넘는 서면을 써야 한다. 불가능할 것만 같은 짧은 시간 동안 그토록 길고 설득력 있는 서면을 뚝딱뚝딱 써 내려가는 변호사들을 보면 경외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명작이 탄생하려면 아무래도 인고와 고민의 ‘시간’이 필요하다. 괴테는 60년에 걸쳐 '파우스트'를 썼다고 하고, 바르셀로나의 상징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가우디가 짓기 시작한 지 어느덧 1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공사 중이다. 서면도 마찬가지인데, 쓰는 사람은 잘 모르지만, 재판부처럼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글이 어느 정도의 고민을 거쳐 쓰여진 것인지, 충분한 시간 동안 이런 저런 연구를 해 보고 쓴 것인지를 너무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 같은 변호사들이야 수 많은 사건 중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사건을 맡기는 사람으로서는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그리하여, 인생은 살기 어렵고 세상은 점점 복잡해 진다고 하는데, 서면이 그토록 쉽게 쓰여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종수 변호사 (법무법인 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