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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法臺에서

    유성펜과 상아도장

    임영철 부장판사 (대구지법 포항지원)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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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사재판 전날 법대 뒤 사무실 모습을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형사판결을 선고하기 전날은 퇴근 무렵까지 추가적인 변경 사항이 있는지를 기다려서 최종적으로 완성한 판결문에 서명, 날인하는 것으로 일과를 마친다. 형사판결문에 재판장으로서 서명, 날인을 하는 이 절차가 늘 조심스럽고 한편으로는 신성한 과정이라는 느낌마저 들곤 한다.

     

    재판서 관련 규정들을 보면, 판결문은 영구보존문서로 지정되어 있고(법원재판사무처리규칙 제29조), 기타의 결정문들과는 달리 법관이 서명, 날인하여야 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서명’은 본인의 이름을 직접 쓰는 것으로서 인쇄 등 방법으로 이름을 기재하는 ‘기명’과 구분되고, 본인만의 방법으로 이름 또는 그 일부만을 적는 ‘사인’과도 구분된다.

     

    형사판결의 내용이 해당 피고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중대하다는 것은 굳이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형사판결문서 그 자체도 대한민국이 존속하는 한 그 물리적 수명을 국가와 함께하는 것이므로, 이와 같은 문서에 마지막 작성 단계로서 서명, 날인하는 절차는 법관의 위치에서뿐만 아니라 자연인인 한 개인의 위치에서도 상당히 경건하고 신성한 절차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경건한 절차에서 사용하는 도구도 늘 일관되게 고집한다. 나의 책상에는 업무 때 주로 사용하는 연필(아침에 출근하여 뾰족하게 깎여 있는 연필들을 보면 전투력이 상승한다), 다양한 색깔의 볼펜, 싸인펜, 형광펜들이 있지만 판결문에는 유성싸인펜(일명 ‘네○펜’)으로 서명을 하고, 선친께서 내가 법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정성껏 골라 선물해 주신 상아도장을 사용해 날인을 한다. 이렇게 힘주어 내 이름을 적고, 도장을 찍고 나면 해당 사건에서 고민하고 고생했던 지난 순간, 내 어깨를 누르던 사건의 무게가 어느덧 말끔히 날아가는 느낌이 든다. 다른 법관들도 판결문에 서명, 날인을 마치는 그 순간의 기분은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이 경건한 절차에서 부끄럽지 않아야 겠다는 다짐으로 법대에서 다시 새로운 한주의 재판을 마주한다.

     

     

    임영철 부장판사 (대구지법 포항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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