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에 즐겨 보던 외화 시리즈가 있다. 영국 첩보원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는 '007 시리즈'다. 1962년 개봉 후 2012년 50주년을 맞아 23번째 작품을 발표한 영화 사상 최장 시리즈라고 한다. 비슷한 설정과 스토리, 뻔한 결말 등으로 무슨 매력이 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제임스 본드가 던지는 유머와 위트 넘치는 대사 때문이다. 적에게 쫓겨 생사의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넘기고도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무뚝뚝하게 짧게 내던지는 대사가 관객의 웃음을 자아낸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대화나 연설도 그런 관점에서 필자가 가장 닮고 싶은 모습이다.
법조인은 판사, 검사, 변호사 등 어느 직역을 막론하고 늘 말과 글로써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한다. 그런데 말과 글을 잘 하는 교육을 얼마나 받았을까? 법률이론이나 판례에 관한 강의는 많이 들었을 것이나 정작 법률문장론이나 법정변론 강의를 들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솔직히 필자는 그런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법원에 들어와 선배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배운 것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수많은 재판 과정에서 본 여러 법조인의 모습도 훌륭한 변론이나 좋은 글쓰기의 시각에서 보면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좀 과장을 더하면 낙제 수준도 적지 않다. 물론 당사자나 대리인에게는 사건의 결론이 제일 중요하겠지만 이왕이면 좀 더 폼 나게(?) 사법절차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변론이나 준비서면이 핵심이 없이 장황하거나 논리정연성이 떨어지면 듣거나 읽는 사람도 함께 길을 잃게 된다. 그것도 작전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판사의 시간도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재다. 그래서 꼭 필요한 곳에 효율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핵심을 찌르는 변론이나 글이 되려면 우선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재판이 한참 진행되는 도중에 의뢰인에게 다시 물어 보았더니 사실관계가 처음과 다르다는 답변은 이미 이기기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최형표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