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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초포럼

    지연된 정의

    홍기태 원장 (사법정책연구원)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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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상반기 법원의 민사본안 합의사건 처리율은 68.5%로, 10년 전 92%에 비하여 23.5%나 떨어졌다고 한다(법률신문 2020. 8. 17.자). 코로나19 대유행이 재판에 심각한 지장을 가져온 탓도 있겠지만, 민사사건을 비롯한 법원의 사건 처리율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급격히 추락하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나라 사법은 신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어느 나라보다 앞서 왔고, 불철주야 재판업무에 매달린 법관과 법원구성원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특정 사건에서 재판지연에 대한 불만은 있었을지언정 재판지연이 사법불신을 초래하는 주요 원인으로 꼽히지는 않았다. 소제기 후 5개월 내 판결선고를 하라는 민사소송법 제199조의 훈시는 너무나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소제기 후 5개월이 지나도록 첫 재판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재판지연에 대한 누적된 불만은 결국 전반적인 사법불신으로 귀결되고야 말 것이다. 

     

    이제 통계표를 놓고 판사 간의 경쟁을 부추기거나 승진제도로서 일할 동력을 이끌어내던 시대는 지나갔다. 상급자의 지시나 감독, 승진제도 없이도 독립적으로 헌법상 주어진 책무를 다할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주권자는 법관에게 사법권력을 위임하였고, 법관의 독립이라는 강고한 울타리를 쳐주면서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과를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우리 헌법은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을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라는 규정으로 들여놓고 있다. 신속한 재판은 공정한 재판과 더불어 헌법이 규정한 절차적 정의의 한 축이고, 법관의 재량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국민의 헌법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법관의 책무로 부과된 것이다. 

     

    주중에도, 주말에도 많은 판사들과 법원구성원들이 가득 쌓인 사건을 처리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법관의 증원 없이 재판의 충실과 신속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난제는 근원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판사의 사명감에만 기댈 수도 없는 노릇이다. 판단자로서 냉철함과 깊이를 지속하기 위해서도, 개개인이 누려야 할 존엄과 행복을 위해서도 워라밸이 필요함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급격한 재판지연이 초래할 부정적인 영향이나 사법불신, 기본권 침해를 생각할 때, 재판의 지연을 방지하기 위한 판사들의 고심과 노력을 다시 한번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판사들 사이에서 재판지연의 원인과 대책, 신속한 재판을 보장하기 위한 법관의 책무에 관한 논의가 법관의 독립에 관한 논의에 버금가게 이루어진다면, 그 자체로 사법신뢰를 확보하는 긍정적 신호가 될 것이다.

     

     

    홍기태 원장 (사법정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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