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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강진 재판관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ECCC))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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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24일은 유엔 75주년 기념일이었다. 유엔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기에는 세계 여러 곳의 상황이 암울하지만, 특히 Covid-19에 관한 세계보건기구(WHO)의 대처에 많은 비판이 제기되면서 유엔 직원들의 전반적인 사기는 높지 않은 듯 하다.

     

    최근의 행정지시(ST/AI/2020/5)에 따르면, 유엔은 젠더 평등을 조속히 달성하기 위해, 50:50의 목표치에 이르지 못한 산하 기관으로 하여금 2020년 하반기부터 직원 채용 시 여성 지원자를 최종 후보명단에 반드시 포함시키도록 하고, 그럼에도 굳이 남성을 선발하였을 때에는 그 상세한 사유와 근거자료를 사무총장에게 직접 제출하여 검토를 받도록 조치하였다. 2011년 UN Women을 설립하여 젠더 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노력하여 왔으나, 유엔 내부에서조차 이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절박함이 느껴지는 지시가 아닐 수 없다.

     

    유엔헌장 제7조는 타협과 중재를 통해 평화를 실현하려던 국제연맹이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했던 교훈에 터 잡아 군사행동을 비롯한 강제 수단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이에 따른 최초의 사례가 한국전쟁이다. 서울을 방문하였던 유엔의 동료들은 유엔군이 한반도의 '잊혀진 전쟁'에 참전한 역사가 전시된 전쟁기념관이 가장 인상 깊은 곳이었다고 이야기한다. 한편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근무했던 장 지글러(Jean Ziegler)는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행사로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현재의 유엔을 비판하면서, 때때로 회의를 마치고 나면 절망감을 느낀 동료들과 "우리도 국제연맹과 같은 방식으로 끝나는 걸까?"라는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유엔이 추구하는 목표인 인권의 보장은 개별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 개입하는 형태로서, 해당 국가가 이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유엔 사무총장과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이 최근의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살 사건에 대하여 진상조사와 투명한 정보공개를 요청한 것이 우리나라 정부 입장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인권은 국가나 민족을 초월하는 보편성과 불가침성을 갖는다. 우리나라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보편적 국제인권의 문제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한데, 국제인권규범이 개별 국가의 입장이나 유불리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유엔이 전파하려는 이러한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은 당위에만 머물 뿐, 세계 도처에는 이른바 종족적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 언어, 문화, 종교 등의 특성에 기반한 민족주의)가 여전히 건재하다. 19세기 이후의 전쟁은 압도적으로 종족적 민족주의와 관련하여 발생하였다. 세르비아 청년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에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에서 동력을 얻은 제2차 세계대전을 처음부터 원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국가의 당면한 이익을 위해 근시안적 판단을 내렸고, 국민들은 다른 민족에 의해 지배받지 않기 위해 열띤 애국심으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던졌다.

     

    정체성, 친밀감, 연대감은 인류에 뿌리 깊은 감정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적으로 분출될 경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유엔은 그러한 감정이 좀 더 넓은 범위에서, 더 많은 사람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작용하기를 바라는 인류의 희망을 대변하는 조직으로서, 어떠한 내외부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믿고 지켜야 할 존재이다.

     

     

    백강진 재판관 (크메르루즈 특별재판소(EC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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