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바람이 불어오니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가 떠오른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음에도 자신을 변함없이 따르던 한 역관에게 그려 준 것으로, 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송백이 언제나 시들지 않고 늘 푸르다는 것을 깨닫듯 사람의 지조도 그러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사실 세한도는 그림만 봤을 때는 한 채의 집과 주위에 서 있는 송백, 그리고 땅의 형상을 붓자국이 드러나는 갈필로 간결하게 묘사한 것이 전부여서, 화려한 미술적 기교가 돋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 올 때마다 이 작품이 생각나는 이유는, 단순히 사물의 사실적 외형만을 따라한 것이 아닌 이른바 추사의 사의(寫意; 외형보다 내재적인 정신을 표현하는 화법)가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세한도가 세상에 나왔지만 추사의 굴곡졌던 삶과 세한도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세상에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던 추사의 여러 지지자들이 없었다면, 과연 누가 세한도에 담긴 추사의 사의를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마찬가지로 변호사의 삶은 어쩌면 누군가의 사의를 재판부에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지지자의 자리에 있는 것 같다. 의사표시 해석이 문제되는 대부분의 사건이 그러하겠지만 지적재산권 사안에서는 더 고민이 깊다. 예컨대 제품 모방이 문제되는 부정경쟁방지법 사안에서는 재판부를 설득하기 위하여 단순한 외형 이외에도 창작자의 개발 경위, 디자인 철학부터 때로는 사회적 가치까지 설명하며 해당 제품의 독창성과 창작성을 전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사실 지금 지적재산권 사건의 서면을 한참 공들여 쓰는 중이다. 그러다보니 문득 내가 알고 있는 세한도에 담긴 사의가 어쩌면 진정한 것이 아니라 추사의 지지자들이 좋은 말들로 덧붙여 듣기 좋게 설명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슬며시 웃음이 난다. 아, 다시 일에 집중해야겠다.
김정현 변호사 (창경 공동법률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