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뒤늦게 꽃꽂이 동호회에 가입하였다. 아름다운 꽃을 사무실에 두면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고 꽃향기에 마음 정화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사실 오래 전부터 관심이 있었지만 워낙 둔한 감각이라 언감생심 시도조차 못하였는데, 어느 날 친구가 권유하여 용기를 내었다.
겨우 격주로 꽃을 받아오고 최근에서야 가위를 쥐어보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생각 이상의 즐거운 변화가 있었다. 선배 법관이 주신 잔잔한 무늬의 탁보 위 꽃병은 기록과 판결서로 씨름하는 사무실을 오가는 나의 걸음을 가볍게 한다. 집 현관에 둔 꽃바구니는 신발을 신고 벗을 때마다 작은 기쁨을 준다. 일부 화분은 물주기에 실패하여 말라버렸지만 그것도 적당한 곳에 옮기니 운치가 있다.
"변화의 두려움을 즐기라"는 말이 있다. 일상에서 변화의 시도는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하고 있다. 사무실 계단 오르기를 시작하고, 자전거를 탄다. 피아노를 배우고, 독서모임에 가입하며, 때론 직장을 바꾼다. 내가 결정하고 책임지기에 작심삼일이 될지언정 새로운 시도가 이어진다.
단체나 조직의 경우, 구성원 개인의 결정권과 자율성이 존중·보장되는 역할위주(role-driven) 조직이 위계적(rank-driven) 조직에 비하여 훨씬 변화에 능동적이고 창의성이 높다는 점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와 함께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고위층에서 의사결정을 독점하고 집단적으로 집행하는 구조에서는 젊은 상상력과 과감한 혁신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 가지 결정만이 가능한 이상 쉽게 그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고, 지시하지 않은 사항은 시도되지 않는다. 개별 역할을 평가하고 책임지는 구조에서 혁신이 나온다.
반복하여 듣는 주제들이 있다. 신뢰 제고, 전문성 강화, 국제화, 충실화, 판결서 개선 등 모두 어려운 과제임은 틀림없다. 거시적 비전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구성원들의 자율적 시도와 노력, 건강한 경쟁을 폭넓게 허용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변화도 있지 않을까. 독립적 재판부의 다양한 판결이 있어 판례가 발전하듯, 영상재판이나 구술변론 확대, 국제교류 증대 등도 결국 개별 에너지와 역할 성취에 기초하는 것 아닌가.
이의영 고법판사 (서울고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