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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민소소송법산책② 로마의 법학자

    강현중 변호사 (前 사법정책연구원장·법무법인 에이펙스 고문)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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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마의 법학자라 함은

    (가)
    '법학자'를 라틴어로 'jurisconsultus', 'jurisperitus', 'jurisprudens' 등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consultus, peritus 혹은 prudens는 '정통하다', '숙달하다'라는 의미의 형용사이고, iuris는, jus(법)의 단순 속격형(屬格型), 즉 '법의~' 뜻이다. 따라서 법학자는 '법의 정통한 인사'라고 하는 높은 평가의 인물이 된다. 로마의 사법(私法)은 법조법(法曹法)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법전문가인 법학자들이 로마의 최성기에 사법(私法)의 창조·운용에 큰 역할을 다하였다는 것이다. 법학자는 로마의 역사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로마의 아주 초창기에는 신과 인간과의 여러 가지 교류를 매개하는 집단으로서 사제(司祭)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세속인인 사람과 사람의 교류를 합리적으로 매개하는 집단의 필요성이 증대되기 시작하면서 사제가 아니면서도 사제와 다소 밀접하다는 법학자가 법의 전문가로서 사제의 임무에 필적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나)
    법학자는 오로지 법률적인 문제를 취급하였다. 즉 어떤 사실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문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어떤 사실이 존재한다면 법적으로는 어떤 상황이나 결과가 생기는가를 아리스토텔레스의 3단 논법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법학자는 같은 법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변론가와 구별된다. 이 변론가는 현실의 소송에서 원고·피고의 변호사로서 당사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데, 법학자는 그와 같은 생생한 이해가 교차하는 경우의 등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법학자가 중립적이고 공정한 제3자로서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무상으로 법 지식을 시민에게 나누어준다는 점이다. 법학자의 출신계층을 보면 최상류의 귀족출신자가 우세하고 제2계층인 기사계층 출신자가 법조계에 진출했다가 그로부터 귀족출신으로 바뀌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법학자는 수입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부유한 계층이 대다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고명(高名)한 법학자라면 세상에서 인기가 높아서 민회(民會)의 선거에서 고급 정무관으로 선출되기도 하므로 긴 눈으로 보면 법학자라는 천직(天職)은 확실한 출세 코스일 것일 것이다. 그러나 법학자는 기본적으로 재야(在野)의 사람이다. 물론 공화정 시대에 가장 높은 정무관 지위인 집정관이 된 법학자가 수십 명이고, 제정(帝政)시대에 들어가면 황실의 관료로서 출세한 법학자도 나온다. 제정시대 근위사령관의 지위에 있던 변호사 출신의 마크리누스라는 인물은 카라칼라 황제가 살해되었을 때 근위병의 추대를 받아 217년부터 218년까지 황제의 지위에 있었다.

    (다)
    공화정 초기 단계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법학자의 활동은, 'cavere', 'agere', 'respondere'의 세 가지로 구별된다. 이것은 오늘날, 변호사, 공증인, 법무사, 대학 또는 로스쿨의 법학교수를 포함한 종합적인 것이다. 'cavere'는 일상생활 가운데 법률효과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행위방식을 만들고, 'agere'는 소송의 방식 작성에 조력하였다. 'respondere'는 여러 방면의 자문에 맞추어 법률문제에 관한 해답, 즉 일종의 감정(鑑定)을 하는 것인데 이 활동만이 뒤에 까지 법학자의 임무가 되었다. 이것들은 어느 것이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활동이다. 그러나 법학이 생성(生成) 발전한 기원전 시기로 돌아가 보면 법학자는 실무에 관심을 갖더라도 현대의 재판관과 같은 실무가는 아니다. 공화정에서 민사소송의 판결은 사인(私人)이 내렸기 때문이다. 법학자는 언제나 실무의 제1선과 약간 거리를 둔 아웃사이더였다. 그러나 그들은 실무와 불가분의 위치에 있으면서 법의 적용과 법의 형성 양쪽에 헤아릴 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실무와 학식이 이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갖는 예는 로마시대를 제외하고는 역사상 두 번 다시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법학자가 하는 해답, 즉 감정에는 원칙적으로 법적 구속력이 없다. 재야의 한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활동을 전개하는 이상 이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로마는 무슨 일에도 권위에 순종하는 분위기여서 법학자의 해답은 사실상 정무관이든 개인이든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을 구속하는 힘이 있었다.

    (라)
    법학자가 생각하는 발상의 이면(裏面)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구상(具象)에 속한 고도의 균형감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아 선(善)이라든가 정의(正義)라든가 형평(衡平)이라는 이념을 쫒아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들은 그 당시 세상의 상식과 같은 뿌리일지도 모른다. 로마 법학의 최대 강점은 이와 같이 일상의 논리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은 평범한 자질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마)
    법학자가 정치에서 분리된 것은 공화정 전부를 포함한 로마 역사의 앞부분 시대이고 기원 전후의 뒷부분에서는 그들은 황제를 정점으로 한 권력정치에 밀착되어 있었다.

    (바)
    보통 법학자라고 하면 보수적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다. 이는, 현행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최대의 사명으로 하는 법 그 자체가 보수적인 것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법의 혁신은 거의 모두 법학자의 손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므로 법학자에게는 보수성과 혁신성이 병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원로원계층 출신이 아니더라도 기사계층 출신의 법학자가 경제적인 이해에 민감한 기사계층과 어울려서 합리적, 합목적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아무튼 법학자가 상류계층 출신자의 대부분을 차지한 이상 그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사)
    로마 법학자가 취급하는 소재는 거의 사법(私法)이다. 정치가 복잡하게 얽힌 공법은 그들이 손을 쓸 수 없는 영역이었다.


    2. 로마법학자의 역할은
    (가)
    로마는 '법의 나라'요 '재판의 나라'였다. 사람들은 민사적인 사건에 관해서는 정규의 민사재판을 통해서 해결하는 성향이 있었다. 재판외의 해결방법, 예컨대 사적 중재라든가 화해도 분명이 있지만 법 자료에서는 그들의 큰 역할을 볼 수 없었다. 그 원인의 하나는, 로마 민사소송 제도 자체가 '국가권력의 뒷받침으로 이루어진 중재'라는 성격을 갖고 있어서 사적 중재제도의 존재의미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인이 구체적·구상적인 법을좋아하는 것도 재판을 중심으로 법이 작동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소송의 중추(中樞)에 위치한 법무관이나 심판인은 법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따라서 소송의 밖에서 이를 사실상 통제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면 소송의 안정 및 신뢰성을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역할을 법학자들이 맡았다. 법학자가 소송의 어느 국면에서 관여하였는가를 말한다면, 먼저, 일반적으로는 법무관이 매년 임기의 처음에 공시한 고시 가운데 여러 양식의 방식서를 만들었는데 법학자의 조연을 빌렸다고 생각된다. 고시는 새로운 사회상황을 반영하여 수시로 자세를 바꾸었는데 그 변용을 실제로 지도한 것은 법학자였다. 다음에, 구체적인 소송에서 원고가 되는 자는 법적인 내용의 문제에 관하여 제소의 가능성이나 승소의 가망성을 법학자에게 물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소송절차가 구성된 뒤에도 구체적인 방식서를 둘러싸고 양쪽 당사자의 이해 대립이 적지 않은데 법무관이 이 대립을 통제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법무관은 종래의 범위에 속하지 않은 방식서의 작성을 법학자의 지도에 의존하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심판인은 사실문제에 관해서 심리하는데 그와 관련하여 법률문제에 직면하면 역시 법학자에게 지도나 조언을 구하였을 것이다. 물론 법학자는 단순히 조언만 할 뿐 그 견해에 법적 구속력이 없으나 법학자라는 전문직의 무게, 법학자의 개인적 자질의 중요성에서 실질적으로는 압도적인 의미를 지녔다.

    (나)
    현대의 민사재판에는 법률가인 재판관이 현실의 재판에서 구체적 사실인정을 기초로 법적인 판단이 이끌어지고, 그것이 축적되어 이른바 '판례법'이 형성되었다고 생각되는데 만약 눈앞의 사건에 관해서 성문(成文)의 규범 혹은 판례법이 존재하지 않은 경우에는 문제의 사건에 적합한 규범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그러한 규범을 만들기 위해서 소송전체를 통괄하는 현대의 재판관 같은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할 기준을 미리 설정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3단 논법에 따른 2단계 처리가 어떻든 필요하였다. 그 결과 어떤 사실이 존재한다고 하는 가정이나 추정 아래 어느 규범을 그 사실에 맞추어 만든다고 하는 작업과 그 사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여부를 심리하는 작업이 별개의 인격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복잡한 과정은 전문가로서의 법학자 조력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다) 로마 제정에서 법학자와 소송

    로마제정에서 법학자의 역할에는 2개의 측면이 있다. 하나는, 황제의 이름으로 규범을 발포하여 다방면에 미치게 하는 측면이다. 이것은 옛날 공화정시대에 법무관의 활동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재판관으로서 사법의 전면에 나오는 측면이다. 상소심에 계속된 중요한 소송에 관하여 법학자가 재판관의 역할을 다하는 것은 공화정시대에는 없었다.

    (라) 제정시대의 법률가

    로마제정시대의 민정 관료들은 모두 법률가들 중에서 채용하였다. 황제는 그들의 재능과 노력이 언젠가는 정부의 주요 직위를 맡음으로써 보상되리라는 확신을 주면서 연구에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 동·서 로마 제국의 대도시에서는 모두 이처럼 출세가 보장되는 확문의 기초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는데 페니키아 해안에 있는 베이루트 법학교가 가장 유명하였다. 정규 교육을 마친 학생들은 부와 명예를 찾아 속주 각지로 흩어졌다. 그러나 로마 쇠퇴기에는 법률가들의 승진에 부정이 만연해 있어 한때는 귀족들의 신성한 유산으로 계승되었던 고귀한 법률 지식은 이제는 지식보다는 간사한 책략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부패한 해방노예와 평민의 소유로 전락해버렸다.


    강현중 변호사 (前 사법정책연구원장·법무법인 에이펙스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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