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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초포럼

    인맥지수

    천경훈 교수 (서울대 로스쿨)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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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던 때다. 갑자기 어떤 지방법원의 형사사건을 맡아 달라는 전화가 심심찮게 오기 시작했다. 공정거래, M&A 등 기업자문을 하던 나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다. 알고 보니 그 법원의 형사단독 판사 한 분과 내가 사법연수원 기수, 출신학교, 나이 등이 비슷해서 변호사 소개 사이트의 '인맥지수'가 99점이나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친한 분이기도 했다. 형사는 전문분야가 아닌 데다가 로펌에 소속된 몸이라 수임이 어렵다고 일일이 거절했지만, 꼭 맡아 달라는 부탁 너머에서 인맥지수 99점 변호사에 대한 비릿한 기대가 느껴졌다.


    같은 지역에서 자라거나 같은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직접적으로든 한 다리 건너서든 다양한 인연을 맺게 된다. 서로 어울려 놀고 다투고 공부하면서, 함께 추억을 쌓기도 하고 미래의 꿈을 키우기도 한다. 공유하는 경험과 기억이 늘어갈수록 어려울 때 의지하고 필요할 때 신뢰하고 싶어진다. 이렇게 형성된 인맥은 때로는 공과 사를 흐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각자의 인생에 큰 힘과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내가 재직하는 법학전문대학원의 정원은 한 학년에 150명이다. 이 정도 인원이 3년 내내 도서관과 강의실에서 서로 부대끼다 보면 미운정 고운정이 들기 마련이다. 법전원 출범 초기인 10년쯤 전,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동기 중에서 몇 명 정도 서로 알고 지내는지 물어보면, 대략 100에서 120 정도의 숫자를 말했다. 나는 한 기수에 300명이던 시절에 사법연수원을 다녔는데, 최근 동기분들과 기억을 되짚어 보니 절반 정도 알고 지냈던 것 같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크게 달라졌다. 같은 학과 같은 학번끼리 통성명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법전원 동기들끼리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동기 중에서 몇 명 정도 알고 지내느냐는 질문에 요즘은 30명 내외의 숫자를 말하곤 한다. 10년 전보다 3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코로나19 이전에 이미 그러했으니 지금은 그런 경향이 더 심해졌을 것이다.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들도 "요즘 신입변호사들은 왜 같은 학과나 같은 법전원을 나왔는데도 서로 모르죠?"라며 의아해한다. 이력상 어떤 사람을 잘 알 법한 인맥지수 99점급의 변호사를 로펌 안에서 어렵게 찾아 물어보면, 그 사람과 친하기는커녕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인맥지수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진정한 '개인'들이 한국 사회에 등장한 것이다.

    학생들의 상호교류가 희미해져 가는 현상은 무척 안타깝다. 대학에서는 강의를 통해서보다 동료들끼리 토론과 협력과 자극을 통해 얻는 것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제 인맥에 기대어 부정한 청탁을 하거나 인맥을 팔아 장사하는 시대는 점점 저물겠구나 하는 희망을 보기도 한다. 정겨운 상호교류가 사라진 곳에는 건조한 이기심이 남을 것이고, 비릿한 인맥 장사가 사라진 곳에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일 처리가 남을 것이다. 후자를 이루면서도 전자의 문제점을 방지하려면 어떤 대학문화가 필요할지 고민해 봐야 하겠다.


    천경훈 교수 (서울대 로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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