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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사의 역할이 바뀔 때가 되었다.

    김주영 변호사(법무법인 한누리·대한변협 법제연구원장)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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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가까이 송무를 해 온 변호사로서, 과중한 업무를 감당해 내는 재판부에 늘 경이로움을 느낀다. 지난 9월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판사 한 명이 연간 담당하는 사건은 464건으로 한국과 사법 시스템이 비슷한 독일의 5배, 일본의 3배 수준이라고 한다. 464건을 12개월로 나누면 한 달에 38건이 넘는데 이를 변호사 수임건수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다. 서울변호사회에 따르면, 변호사의 1인당 월평균 사건 수임 건수는 2019년 기준 1.26건에 불과하다. 중소로펌에서 여러 후배변호사와 팀워크로 사건을 수행하는 필자도 신건이 한 달에 한두 건에 불과하지만 이마저도 제대로 처리하려면 매우 큰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판사들은 매달 38건이 넘는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소송을 수행하다 보면 재판부는 변호사들이 제대로 된 법적 검토 없이 저인망식으로 제기하는 주장들, 소송을 지연시키거나 쟁점을 흐리기 위해 하는 주장들, 뻔한 사실인데도 잡아떼는 부인과 항변도 일일이 다 읽고 판단해서 판결문에 담아야 하고, '거짓말 대잔치'인 증인신문을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들어야 하며, 자기 확신에 빠진 당사자들의 주장을 참고 경청해야 하니 참으로 그 노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 재판부의 태만이 야속할 때도 많다. 별 새로울 것도 없는 변론을 듣자고 변론기일을 계속 속행하다가 해가 바뀌어 재판부가 변경되면 재판은 하릴없이 늘어지고, 문서제출명령에도 불구하고 핵심증거를 내놓지 않는 당사자에 대하여 별 다른 조치도 취하지 않고, 명백히 거짓되거나 모순되는 주장을 펴는 변호사에 대해서 별다른 제재도 가하지 않고, 진실을 밝히는 데 꼭 필요한 당사자신문이나 증인신문도 채택을 꺼려하고, 조속히 이루어져야 할 절차상 결정이나 가처분, 비송사건을 지나치게 느긋하게 처리하는 그런 경우들도 종종 경험한다. 험난한 과정을 거쳐 나온 판결문은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상세한 서술을 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판결의 결과에 대해 당사자들은 납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재판은 점점 더 지연되고, 변호사들과 당사자들 불만은 더욱 더 쌓여가고, 판사들은 점점 더 혹사당해서 경력법관 충원조차 어려운 우리 사법체계의 현실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숙명여대 법학부 변진석 교수의 2013년 논문 '미국 연방민사소송법상 증거개시제도와 판사의 역할: 관리주의적 판사의 등장과 그것이 소송제도에 미친 영향'은 1938년 미국 연방민사소송규칙이 제정되기 이전 미국 판사들의 역할과 그 이후 판사들의 역할변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요지로 설명한다.

    "1938년 이전에는 분쟁 당사자들이 상대방이 서로 무슨 증거를 가지고 어떠한 주장을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되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술수와 책략을 사용하게 되고 따라서 정의에 부합하는 분쟁의 해결이 어려웠다. 이에 미국의 법조계는 그 때까지의 민사소송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연방민사소송규칙을 채택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한 변화 중 가장 획기적인 것은 증거개시제도이다. 미국 민사소송법상의 증거개시제도는 분쟁당사자들에게 서로가 가진 분쟁관련 정보와 증거를 상대방에게 제공하여 서로 공유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분쟁당사자와 판사가 가능한 한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가지게 하고, 이를 근거로 정의에 따른 분쟁해결을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증거개시제도의 도입은 사법제도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는데 특별히 1938년의 사법개혁은 재판을 주관하는 판사의 역할을 '수동적 판단자(passive decision maker)'에서 '적극적 관리자(active manager)'로 바꾸었다. 이와 같이 일단 판사의 역할이 바뀐 이후 판사들은 그러한 역할을 이용하여 소송을 재판 없이 합의에 의해서 조기에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그 결과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민사소송에서 재판의 빈도는 극적으로 감소하게 되었다."

    당사자와 변호사들이 서로 가진 핵심 증거를 숨긴 채,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만 제출하고 교묘히 왜곡된 주장을 펴면서 진실발견을 방해하고, 별 의미 없는 주장과 답변이 반복되는 서면공방을 길게 이어가는, 그래서 변호사의 기교와 술수에 의해서 승패가 판가름 나는 1938년 이전의 미국 법정은 우리나라 현재의 법정과 모습이 많이 닮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진실발견을 위한 절차적 역할에는 소극적이면서 최종적인 판단에 정력을 쏟는 1938년 이전 미국 판사들의 모습도 우리의 현재 판사들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도 이런 '수동적 판단자'인 법관으로서는 더 이상 현재와 같은 복잡다단한 분쟁을 신속하고도 공정하게 해결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 봉착했다. 이제는 판사의 역할이 바뀔 때가 되었다. 정작 재판의 과정에서는 소극적, 수동적인 역할에 그치다가 최종적인 판결문 작성에 많은 시간을 쏟아 붓는 판사가 아니라 변호사들과 당사자들로 하여금 쟁점에 집중하도록 하고, 모든 관련 증거를 제출하도록 하고, 가능한 한 소송을 판결에 이르기 전에 합의를 통해서 종결하도록 관리하는 관리주의적 판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첫 단계가 최근 법원행정처가 본격 검토하는 증거개시제도의 도입이다. 변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증거개시는 소송의 당사자들이 다툼이 있는 모든 쟁점과 그 쟁점에 관련된 사실을 서로 알게 하고, 판사는 쟁점의 정리를 통하여 의미 없는 쟁점을 정리해서 기각시킴으로써 당사자와 변호인들이 중요한 쟁점에 집중하도록 하여 분쟁을 신속하고, 저렴하며, 정의에 부합하도록 해결한다. 증거개시제도의 도입이 화해를 촉진하는 이유는 판사가 증거개시 과정에서의 분쟁을 해결하거나 증거개시를 통해서 불필요한 쟁점을 정리하다보면 양 당사자가 자신과 상대방 주장의 장점과 한계를 파악하게 되고 많은 경우 더 이상의 재판이 필요 없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변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1938년 연방민사소송규칙이 도입되던 해 미국에서 재판으로 종결된 민사소송은 전체 법원에 접수된 소송의 20%였지만 2년 후인 1940년 재판으로 종결된 민사소송은 전체 소송의 15.4%로 감소하였고, 1990년에는 전체 소송의 4.3%만이 재판으로 종결되었다. 반면 같은 기간 동안 재판에 가지 않고 합의로 끝난 소송 건수는 1938년 전체 소송건수의 14%에서 1990년에는 34%로 증가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을 미국 법조계에서는 '사라지는 재판'이라고 표현한다. 소송이 재판까지 가지 않고 당사자들의 합의에 의해서 종결되도록 하는 것은 사법자원의 효율적 사용에 크게 기여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다투는 두 당사자가 모두 만족하는, 최소한 모두 받아들이는 분쟁의 해결이라는 점에서 승패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재판보다 사회적 만족도가 더 높은 해결방식임이 분명하다. 올해 우리나라에서도 1938년 미국에서 행해진 사법개혁이 본격 추진되어 '불필요한 재판이 사라지고', 당사자도, 변호사도, 판사도 모두 윈-윈하는 미래지향적인 사법시스템이 구현되기를 기대한다.


    김주영 변호사(법무법인 한누리·대한변협 법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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