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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초포럼

    시스템이라는 것

    천경훈 교수 (서울대 로스쿨)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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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로 세상이 멈추기 직전, 독일에서 온 교수들을 모시고 경주에 답사를 갔다. 한 분이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져서 급히 119를 불렀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달리는 구급차 안에서 20대로 보이는 구급대원은 침착하게 혈압, 산소포화도, 혈당 등을 측정하고 환자의 병력과 상태를 문진했다. 내가 통역을 했지만 영문 의료용어는 그녀가 나보다 더 잘 알았다. 환자를 인계받은 한적한 현지 병원에서도 능숙하고 신속하게 CT와 MRI 검사를 수행했다. 다행히 심장이나 뇌에는 이상이 없었고 평형기관 문제인 것으로 진단을 받았다.


    동행한 독일 교수들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한국 의료인들의 전문성과 의료시스템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지방 소도시에서 마주친 깔끔한 일솜씨는 매우 신선했다. 구급대원, 원무과 직원, 간호사, 의사 분들이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으로 일을 착착 해냈다. 각자의 직무가 잘 정의되어 있었고, 그에 맞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의료시스템과 헌신적인 의료인들이 있어 코로나-19 상황에서도 비교적 잘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이 사회에 대해 늘 불만을 토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 곳곳에는 경주에서 만났던 분들처럼 묵묵히 직분을 다하는 분들이 탄탄하게 버티고 있다. 그분들 덕택에 기차와 버스는 시간 맞춰 운행되고, 택배나 배달 음식은 어김없이 도착한다. 그분들 덕택에 우리는 통신망이 불통 되더라도 곧 복구될 것이고, 산불이 나더라도 곧 진화될 것이며, 범죄가 발생하더라도 범인은 결국 잡힐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 여러 비난 속에서도 법원과 검찰은 엄청난 수의 사건을 처리해내며 사법체계를 지키고 있고, 기업인들은 새로운 사업과 시장을 끊임없이 개척한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각지의 연구소도 바삐 돌아간다.

    무슨 애국적 열정이나 비장함이 아니라, 그냥 건전한 직업의식과 직무능력을 바탕으로 맡은 일을 성실히 하는 것. 그럼으로써 각자 밥벌이를 하고 사회 전체가 굴러가게 하는 것. 아직 미흡한 점이 많지만, 그래도 이런 것들이 지난 70여 년간 쌓아 온 이 나라의 기반이요 이른바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탄핵으로 대통령이 공석인 때에도 그 시스템은 큰 문제 없이 작동되었다. 정부는 정부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병원은 병원대로, 각자의 매뉴얼에 따라 각자의 일을 했다. 반면 자신들의 신념에 맞지 않는다거나 앞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라는 이유로 함부로 칼을 휘두르다가 그나마 돌아가던 시스템마저 고장 낸 사례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았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누가 국회 다수당이 되든, 누가 지방선거에서 이기든, 결국 이 나라를 움직이는 힘은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그러니 누가 정권을 잡든 이러한 시스템에 대한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하고, 모든 개혁은 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라를 살리겠다는 애국인사의 호언보다 건전한 사회인의 직업윤리를 더 신뢰하는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천경훈 교수 (서울대 로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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