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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결 읽어주는 변호사

    [책 읽어주는 변호사]그 시절 최고로 힙했던 언니가 들려주는 삶에 대한 유쾌한 이야기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 (노라 에프런 지음, 김용언 옮김, 반비 펴냄)

    김소리 변호사 (법률사무소 물결)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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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들어 여성 변호사님들, 특히 또래 여성 변호사님들을 마주치면 뭔지 모를 반가운 마음이 든다. 변호사가 된 직후에는 변호사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변화고 업무에 익숙해지느라 바빴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나의 성별이 크게 의식되지 않았던 것 같다. 연차가 올라가고 법조계 일원이 되어가면서, 남초 법조계가 몸으로 느껴지고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역시 이 세계에서도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갔다. 그렇기에 오랜 시간 법조계에 속해 살아가는 여성 변호사님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힘이 됨을 느낀다. 내가 운영하는 책방에서 변호사이자 SF 작가인, 내게는 선배 변호사인 정소연 변호사님과 올해 초 북토크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우리는 여성 롤모델을 찾기가 참 어렵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여성 롤모델은커녕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하나 둘 여성 동료가 사라지는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노라 에프런의 에세이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에 눈길이 갔다. 노라 에프런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 '줄리 앤 줄리아' 등을 연출한 헐리우드의 여성 감독이다. 요즘 세대에게는 너무 옛날 영화이긴 한데, 적어도 이름은 다 들어본 영화일 것이다. 특히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명장면, 식당에서 샐리역의 맥라이언이 가짜로 오르가즘을 연기하는 장면은 한 번쯤은 다 봤을 듯하다. 해리가 샐리에게 지금까지 자신은 모든 여자를 만족시켰다고 이야기하자 샐리가 여자들은 만족하지 않아도 만족한 척 연기할 수 있다며 가짜 오르가즘을 연기하는 장면 말이다. 지금 봐도 통쾌한 장면이다.

    이런 영화를 연출한 노라 에프런의 에세이라니, 게다가 "내게는 수많은 실패작들이 있다"니! 마찬가지로 남초세계인 헐리우드에서 여성 감독으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라니 끌렸고, 이런 성공한 사람에게도 수많은 실패의 경험이 있다는 책 제목에서 뭔가 위로를 받거나 조언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끌렸다. 사실 이 책은 잔잔하게 삶의 위로를 건네는 글이라기 보다는 노라 에프런의 삶에 대한 위트가 드러나는 글들이다. 노라 에프런이라는 이름을 원래 알고 있지는 않았는데, 그녀는 원래 '뉴욕포스트'기자 출신이자 '에스콰이어', '뉴욕' 등 여러 잡지에 기고 글을 쓰며 이미 유머러스하면서도 지적이고 세련된 글을 쓰는 에세이스트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세상의 중심이라 불리는 뉴욕에서 기자 생활을 하고, 영화산업의 중심 헐리우드에서 감독으로 성공한 여성의 이야기는 읽어보고 싶게 만들기 충분했다.

    '저널리즘에 대한 러브스토리'라는 장에는 그녀가 저널리즘의 세계에 입문하여 성장하는 과정이 담겨 있는데, 당시 언론계에서 여성이 얼마나 부차적 존재로 다뤄지고 차별대우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물론 노라 에프런은 이 과정 역시 특유의 위트로 재미있게 이야기한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 'LA 포스트'의 스포츠면 담당자의 강연을 들었는데, 여성이었던 그가 강연 도중 언론계에 여성 인력이 매우 적다는 말을 듣고 갑자기 기자가 되고 싶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그녀는 첫 직장으로 '뉴스위크'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녀가 맡은 일은 기사를 쓰는 일이 아니라 '우편 담당 아가씨'였다(당연히 '우편 담당 총각'은 없다). 그녀는 '뉴스위크' 내에서 여성이 밟는 단계대로, 자료 정리 담당과 조사 담당을 거쳤다. 그녀는 기사에 있는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팩트체크' 일을 담당하는 조사 담당 시절, 잘못된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일과 관련이 있는 남성 담당자들은 다 건너 뛰고 너무나 쉽게 곧바로 말단에 있는 여성의 탓으로 돌렸던 일화를 이야기한다. 그녀는 "당신이 여성이고 뭔가를 하고 싶어 한다면, 규칙을 어기고 예외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시절이었"(31쪽, '저널리즘에 대한 러브스토리' 중)고, 한참 지난 후에 보니 "뉴스위크에서 성차별이 얼마나 깔끔하게 제도화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지금도 사회에서 구조적 성차별을 느끼고 있기에, 노라 에프런의 위 경험들은 여성이라면 특히 공감할 것 같다.

    이후 그녀는 뉴욕포스트로 옮겨 '기사를 쓰는' 기자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책에는 뉴욕포스트에서 기자로서 여러 훈련을 받으며 성장하는 내용과 그녀가 얼마나 저널리즘, 즉 자신의 일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난다. 그녀가 기자로 훈련받는 과정은 변호사들이 로펌에서 훈련받는 과정을 떠올리게 했는데, 한편으로 나는 내 일을 그녀만큼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녀가 부러웠다. 개인적으로 요새 가장 부러운 사람은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100세를 넘긴 철학자 김형석 교수도 행복하려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당시의 그녀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책에는 이외에도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정말 쓰기 싫었고 영화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썼던 시나리오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였다는 사실이나(실제 스토리는 이것보다 더 재미있다.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그녀가 겪은 두 번의 이혼에 관한 이야기, 나이듦에 대한 이야기, 책 제목인 수많은 실패작에 대한 이야기 등 그녀의 삶의 경험을, 무엇보다 유쾌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녀가 이야기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은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영화처럼 장면으로 이미지화되는 매직(?)이 있었다. 또, 그녀의 에피소드에는 저널리즘이나 영화계에 유명한 사람들이 실명으로 많이 언급되는데, 아무래도 나는 그녀가 산 시대와 달라서인지 잘 알지 못하는 인물들이지만 만약 이 인물들을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면 화자의 나이가 한 40~50대 정도로 느껴지는데, 실제 노라 에프런이 이 책을 쓸 당시 나이는 무려 69살이라고 해서 놀랐다(참고로 그녀는 2012년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본인의 나이듦에 대해 웃프게 이야기하지만, 글을 읽으면 그녀는 확실히 젊게 사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비롯해 그녀의 영화를 재미있게 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여성으로서 일하고, 결혼하고 이혼하고, 또 나이 들어가는 삶에 대해 기분 좋은 통찰을 느끼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볼 만한 책이다.


    김소리 변호사 (법률사무소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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