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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초포럼

    山民 한승헌(1934~2022)

    홍기태 원장 (사법정책연구원)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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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민주, 지금은 당연하지만 한때는 목숨을 걸어야 했던 가치였다. 1972년 초헌법적인 10월 유신이 단행된 직후, 역설적으로 변호사법 제1조는 '기본적 인권옹호'를 변호사의 사명으로 선언한다(1973. 1. 25. 개정법). 변호사의 사명이 빛을 발해야 할 어둠의 시대에, 자유와 인권을 위해 온 몸을 바치신 분이 바로 한승헌 변호사님이다.


    변호사님은 1965년 소설 '분지' 필화사건의 변론을 시작으로 수많은 시국 사건에서 피고인의 곁에 섰다. 문인이기도 한 변호사님은 1975년, 3년 전에 쓴 '어떤 조사 -어느 사형인의 죽음 앞에-'로 필화를 겪으며 9개월 간 구속되어 피고인석에 서게 된다. 국회의원 김규남 등을 사형시킨 간첩단 사건을 비판한 글이 북한을 고무·찬양하여 반공법을 위반하였다는 죄목이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다시 구속되어 복역을 하게 된다. 8년간이나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어 생계의 곤란을 겪으면서도, 한번도 정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셨다. 변호사님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1975년 사형에 처해진 여정남의 죽음을 가장 안타까워했다. 당신도 구속 수감 중이던 구치소에서, 직접 변호했던 피고인이 대법원 판결 후 18시간 만에 사형집행되었다. 새벽 시간 사형집행을 알지 못하였던 변호사님은 "기가 막힌 일이었다"고 늘 가슴 아파하셨다.

    여기 언급된 간첩단 사건과 반공법 사건, 내란음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전부 뒤늦게 재심을 통하여 무죄가 선고된다. 원 사건을 기소한 검사도, 유죄를 선고한 판사도, 치열한 변론을 했던 변호사와 한승헌 피고인도 모두 법조인이었다. 그저 그들의 양심과 소신이 달랐다고 설명하면 그만일까.

    변호사님은 바위같이 단단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 포용과 성실을 가득 담은 분이었다. 당신이 '정찰제 판결'을 내리는 곳이라고 빗댄 법정에서의 변론은 늘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였다. 그렇지만 "불의한 권력 앞에 맨 몸으로 끌려나온 의로운 한 인간을 외롭지 않게 해주겠다"는 생각으로 변호인석을 지켰다.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논란이 많던 형사소송법 개정 등에 수많은 시간을 쏟으면서 어떻게든 합의를 이끌어 내려고 노력하셨다. "사개추위 위원장은 비상근직인데, 사실상 상근을 해서 법을 어기고 있다”는 특유의 유머를 날리시면서.

    변호사님은 어느 로스쿨 강연에서, 법조인이 새겨야 할 정리된 어록을 남기셨다. 법조인은 학기(學妓)가 아닌 지사(志士)가 되어야 한다. 대접보다는 존경받는 법조인이 되라. 입신(立身)을 한 다음에는 헌신(獻身)을 하라. 잘난 사람보다는 바른 사람을 지향하는 법조인이 되라. 권위의 화석이 아닌 정의의 화신이 되어라 등등.

    당신이 스스로에게 하였다는 '자랑스럽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럽게 살지는 말자'는 말씀을 되뇌는 순간, 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게 된다. 그런 부끄러움을 가르쳐주시는 변호사님이 그립다.


    홍기태 원장 (사법정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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