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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민의 법문정답

    [박성민의 법문정답] (3) ‘정체성 정치’에 빠진 정치

    法問政答 : '법이 묻고 정치가 답하다'

    박성민 대표 (정치컨설팅 민)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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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정체성’이 있습니다. 개인만 아니라 집단도 정체성이 있습니다. 국가·민족·종교·지역·성·인종·문화·사상 등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다양하지만 정체성에 집착하는 이유는 같습니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겁니다. 헤겔은 인간의 모든 갈등은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이라고 통찰했습니다. 헤겔은 이를 ‘인정 투쟁’이라고 불렀습니다.

     
    전쟁, 혁명, 테러, 제노사이드도 정체성 탓입니다. 투표, 소비도 같은 이유입니다. 정체성 투쟁은 곧잘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팬덤이 훌리건이 되기도 합니다. 정치는 전쟁과 스포츠 중간 어디 쯤 있을 겁니다. 전쟁으로 가까이 가면 상대를 ‘죽일’ 적으로 보고 스포츠로 가까이 가면 ‘이길’ 경쟁자로 봅니다. 2008년 미국 발 금융 위기 이후 세계 모든 나라의 정치가 전쟁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저는 2012년 '정치의 몰락'에 이렇게 썼습니다. ‘정치가 몰락하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조롱거리로 전락했고, 정당은 붕괴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길을 잃었다… 정치인, 정당, 제도, 철학이 동시에 위기에 빠진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지금은 경제가 맨 앞인지, 아니면 문화가 그 자리를 차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치가 맨 앞자리를 차지하던 시대가 끝난 건 확실하다… 냉전이 끝나고 세계화가 시작되자 정치의 성취는 10분의 1로 줄어들고 경제와 문화, 스포츠의 성취는 열 배로 커졌다.’


    냉전이 끝나고 세계화가 시작되던 1990년 이후 신학과 철학의 시대가 끝나고 과학과 기술의 시대가 되었습니다.“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는 말이 있는데 오늘날 미래를 창조하는 사람들은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일런 머스크 같은 엔지니어들입니다. 옛날에는 위대하면 유명해졌지만 지금은 유명하면 위대해진다고 믿는 시대입니다. 신학자나 철학자의 말을 듣는 시대가 아닙니다.

     

    정체성에 집착하는 이유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
    지난 대선 젠더 갈등도 이 때문
    우리 정치가 어디로 갈지 걱정


    민주주의의 굳건한 기둥인줄 알았던 법과 제도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헌법 같은‘제도’가 아니라 상호 관용이나 제도적 자제와 같은 ‘규범’이라고 얘기합니다. 허무하지 않습니까. 마치 ‘법치’가 아니라 ‘덕치’(?)의 시대로 되돌아간 느낌마저 드니까요.


    정당의 위기도 심각합니다. 2016년 미국 대선 경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버니 샌더스는 공화당과 민주당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트럼프는 대통령까지 됐습니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도 ‘앙마르슈’를 통해 기성 정당을 뿌리째 흔들며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2012년 안철수가 기성 정당을 위협하더니 2022년 윤석열은 정치 입문 수 개월 만에 대통령이 됐습니다.

     
    정치인의 위상도 많이 추락했습니다. 냉전이 끝나가던 1980년대까지는 미국·소련·영국·프랑스·중국의 지도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았습니다. 냉전이 끝나고 세계화가 시작된 1990년대는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위상으로 축소되고 2000년대에는 ‘당파’의 수장으로 쪼그라들더니 2010년대에는 ‘계파’의 보스로 전락했습니다. 세계적 현상입니다.


    정치만 몰락한 것이 아닙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영국 모두‘찬란한’제국의 위상을 되찾고 싶어합니다. 영국의‘브렉시트’와 미·중 패권전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모두 '제국 정체성' 때문입니다. 그 사이 ‘소박한’ 중산층 삶을 잃은 대중의 분노와 증오를 숙주삼아 쇼비니즘과 포퓰리즘이 팬데믹처럼 확산되었습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정체성(Identity, 한국어판 제목은‘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인정에 대한 요구, 타자 혐오, 포퓰리즘에 대한 뛰어난 통찰을 보여주었습니다. 인정의 결핍을 겪은 이들이 민족·인종·성별·종교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대상에 대한 혐오로 번진다고 갈파했습니다. 지난 대선에서 확산된 ‘젠더 갈등’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정체성 정치’에 빠진 우리 정치가 국제 정치로부터 오는 큰 위기의 파고를 넘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게 걱정입니다.

     


    박성민 대표 (정치컨설팅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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