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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의 회고록 전문 (4)]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부 소묘 (素描) ④ 공안사범과 나눈 2년의 대화 - 법무부 검찰국 검찰 제3과

    박솔잎 기자 soliping@lawtimes.co.kr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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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안처분, 그 재범의 위험성을 재는 잣대는?

     

    법무부 검찰국 제3과

    (1975. 7. 22. - 1977. 8. 31.)

     

    당시의 법무부는 세종로에 있는 정부종합청사의 6층과 7층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안전법이 제정·공포되면서 이 법에 따른 보안처분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검찰국에 신설된 검찰 제3과와 검찰 제4과의 사무실을 급히 마련할 수 없어서 그 청사 5층의 큰 사무실을 임시로 마련하여 두 과의 모든 사무 요원이 함께 사용했다. 30명이 넘는 인원이 비좁은 공간에 서로 어깨를 비비며 일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얼마 후 6층에 제3과와 제4과의 사무실이 마련되어 이사했다. 청사의 가운데 복도를 중심으로 제3과는 동쪽에, 제4과는 서쪽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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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서울청사외관
     <사진=연합뉴스>

     

    당시의 법무부 장관은 황산덕(黃山德), 차관은 김종경(金鍾卿), 검찰국장은 서정각(徐廷覺) 씨였다. 서 검찰국장은 제1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자로서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법대를 거친 검찰의 뛰어난 수재로 검사들의 존경을 받으며 앞으로 검찰 개혁을 이루어 낼 적임자라는 평을 듣던 분이었다.

     

    검찰의 인사와 예산의 주무 부서인 검찰국의 조직이 확대 개편되면서 그 책임자인 검찰국장이 짜 놓은 검찰국 인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검찰 제1과장 정해창(전 법무부 장관)
    △ 검찰 제2과장 최상엽(전 법무부 장관)
    △ 검찰 제3과장 서정신(전 법무부 차관,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 검찰 제4과장 김유후(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 검찰 제3과 검사 - 송종의(전 법제처장), 김영수(전 문화체육부 장관) 및 그의 후임인 김경한(전 법무부 장관)
    △ 검찰 제4과 검사 - 정경식(전 헌법재판관), 주광일(전 국민고충처리 위원장), 박순용(전 검찰총장)

     

    이들의 성명을 밝히는 이유는 검찰국장과 검찰 1과장이 각과 소속 검사들의 인사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두어 이런 인사를 했던 것인지 알게 하기 위함이다. 위 10명 모두가 차관급 이상의 공직을 역임하였으며 그중 7명은 장관급 이상의 공직을 마치고 퇴임한 사람들이다.


    반체제 활동으로 어수선한 시절
    종북 좌파의 활동도 심각한 지경


    판결 아닌 보안처분으로 규제

    대상자의 재범 위험성 여부는
    동향 파악으로 가려 면제 처분

     

    보안처분 결정서 작성도 주된 임무
    평검사로 장관실에 보고도 큰 부담


    보안처분 결정권자는 황산덕 장관
    재임 중 사형집행명령 한 번도 없어
    결정문 서명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해

     

    내가 법무부로 발령받을 때까지 영향력 있는 상사의 눈에 띌 기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설되는 검찰국의 검사가 되었던 것은 국방부 비상군법회의 검찰관으로 1년 6개월 이상 근무하였던 경력이 참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검찰국의 조직이 확대 개편되는 계기가 되었던 사회안전법의 연혁을 살펴본다.


    사회안전법은 1975년 7월 16일 법률 제2769호로 제정되어 그 날짜로 공포·시행되었다. 내가 법무부 발령을 받기 6일 전에 이 법이 제정·공포된 것이다. 그러므로 법률의 시행에 따라 시급히 이 법을 집행하여야 할 필요가 절실했다. 이 법은 몇 차례 개정을 거쳐 시행되다가 1989년 6월 16일부로 전부 개정되면서 법률의 제명도 보안관찰법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시행되고 있다.


    사회안전법개정법률에 따라 명칭이 바뀐 보안관찰법(법률 제4132호)은 노태우 대통령의 서명과 강영훈 국무총리 및 허형구 법무부 장관의 부서로 동 일자 관보(제11256호)에 게재되었다. 이 시기는 내가 대검찰청 형사 제2부장으로 근무하던 때였다.


    사회안전법이 시행될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보면 정권의 정통성 시비가 끊이지 않아서 각종 반체제 활동이 활발하여 시국이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를 훼손하는 묵과할 수 없는 사태가 야기되면서 이념을 달리하는 종북 좌파의 활동이 심각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급기야 판결이 아닌 보안처분으로 이들의 활동을 규제하여야 할 필요성이 절실했다.


    동법 제1조에 명시된 바와 같이 “특정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을 예방하고 사회 복귀를 위한 개선 교육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보안처분을 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사회의 안녕을 유지함을 목적으로” 이 법이 제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법의 보안처분대상자는 형법, 군형법,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중 내란, 외환과 같은 국가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내용의 범죄를 범하여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를 받고 그 집행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검찰 제3과가 출범하면서 파악된 이 법의 보안처분대상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므로 이 대상자 중 위험성의 정도를 가려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에 대하여는 그 경중에 따라 각 2년 기간의 보안감호, 주거제한, 보호관찰 중 그에 합당한 보안처분을 하고, 재범의 위험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에 대하여는 보안처분을 하지 않기로 하는 내용의 면제처분이 이루어졌다.


    이 법에 따라 전국의 각 검찰청에서는 관내의 보안처분대상자를 파악하여 그들의 재범 위험성 유무와 그 정도를 가리는 어려운 작업이 진행되었다.


    죄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관점에서 사건을 수사해 온 검사들이 죄의 성립 여부가 아닌 재범의 위험성 유무와 그 정도를 가려내는 조사를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재범의 위험성이란 것 자체가 추상적이고 때로는 주관적인 것이어서 이 위험성 판단만큼 어려운 것도 없을 것이다. 대상자가 범한 보안처분 대상 범죄의 내용 이외에 여러 가지 사정을 참작해야만 비로소 재범의 위험성 유무와 그 정도를 가릴 수 있는 것이니, 사건 수사에만 익숙한 검사들이 이 사건 조사를 제대로 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대상자의 재범 위험성 유무를 가리려면 그의 가족 상황, 친족 관계, 성장 환경, 학력, 교육과정 및 경력 등 그의 인적 사항에 관한 상세한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가 저지른 보안처분 대상 범죄는 그 내용, 범행 동기, 공범 관계 등 범죄에 관련된 모든 내용을 알 수 있는 조사가 필수적이다.


    복역 후 출소하였다면 복역 상황, 행형 성적, 출소 후의 직업, 생활 상태, 생활 정도, 직업, 주거 이동의 원인과 내용, 가족, 친지 등의 평판 등 출소 후의 동향이 낱낱이 파악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품고 있는 그의 사상 동향이다. 현재 지니고 있는 이념이 어떤 것인지, 사상 전향에 대한 의사 유무, 전향의 의사가 있다면 그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규명하여야 하며, 그 진술의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를 철저히 조사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그의 신상에 관한 거의 모든 내용을 조사하여 이를 조서로 만들어야만 그나마 어렴풋하게 대상자의 재범 위험성 유무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 조사가 보통 형사 사건의 조사와 크게 달라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공안사범을 조사해 본 검사가 많지 않았던 일선 검찰청에 이 어려운 조사를 하도록 임무가 부여되었으니, 이를 제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일선 검찰청에서 보안처분대상자에 대한 보안처분이 상당하다는 의견서를 첨부하여 법무부로 올라오는 많은 기록이 부실하기 짝이 없으니 법무부 검사의 일 처리가 쉬울 리가 없었다.


    검찰 제4과에는 이 보안처분청구 또는 면제청구 사건 기록을 접수하여 보안처분심의위원회에 회부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었는데, 검찰 제3과와 달리 3명의 검사를 배치하였던 것은 이와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검찰 제4과에서 보안처분청구와 함께 보안처분사안 기록이 제3과로 넘어오게 된다. 검찰 제3과는 보안처분심의회를 주관하는 부서였다. 그러므로 형사 사건에 비유하면 검찰 제4과는 검찰청, 검찰 제3과는 법원의 역할을 담당하는 부서라고 보면 되겠다.


    검찰 제3과에서는 제4과로부터 회부된 사건에 따라 주기적으로 보안처분심의회의를 개최하여 그 심의회에서 보안처분청구의 적정 여부를 가려 각 대상자에 상응하는 처분을 결정하여 법무부 장관에게 보고함으로써 장관 명의로 보안처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보안처분심의위원회의 간사였다. 보안처분 심의위원들께서 이 많은 사건 기록을 일일이 검토할 수 없으므로 검찰 제4과에서 청구된 사안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여 사안마다 간략한 조사보고서를 만들어 이를 보안처분심의회의 회의 자료로 제공함으로써 심의위원들이 합당한 결론에 이르도록 돕는 것이 간사의 주된 책무였다.

     

    보안처분심의위원의 임기는 2년으로서 보안처분심의위원회 위원장은 당연직인 법무부 차관이었고, 나머지 위원 6명은 법무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 또는 위촉하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었으며, 그 위원의 과반수는 법관, 검사, 군법무관 또는 변호사의 자격이 있는 자라야 한다는 것이 법의 내용이었다.


    최초의 보안처분심의위원회는 당연직인 김종경 법무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정희택(鄭喜澤), 송명관(宋明寬) 등 대부분 법조계의 명망 있는 원로인사 6명이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위원장께서는 워낙 성품이 원만한 분이었으므로 법조 원로들인 여러 위원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위원회를 잘 이끌어 주셨다.


    보안처분심의위원회의 의결로 보안처분의 종류가 결정되면 사안마다 보안처분 결정서를 작성하여 법무부 장관의 서명을 받아 그 집행을 지휘하여야 하므로 보안처분심의위원회의 운영과 처분결정서의 작성이 내게 주어진 주된 임무였다. 나는 검찰 제3과 검사로 근무하는 동안 이 일에만 매달려 2년 남짓한 세월을 보낸 것이다.

    이런 형식적인 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지만 한두 번 보안처분심의위원회를 운영하다 보니 위원으로 위촉된 분들은 그 명성에 걸맞는 경력과 전문 지식을 겸비한 치밀한 사람이었다. 중요한 사안에 대하여 간사인 내게 재범의 위험성 정도에 관한 의견 진술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직접 그 대상자를 조사한 것이 아닐뿐더러 기록만 가지고는 전혀 답변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을 당하는 때도 있었다. 이런 사안은 결정을 보류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데, 이걸 어떻게 보완하느냐가 큰 문제였다.


    일선 검찰에 지시하여 해결할 수 있는 사례가 별로 없어서 그 대상자가 있는 현지를 찾아가 직접 조사하거나, 때로는 교도소에 수감된 대상자를 찾아가 면담하면서 조서를 만들어야 했던 사례가 많았다.


    특히 보안처분의 기간 갱신 결정을 해야 하는 사안에 있어서는 그가 수감된 교도소에 직접 찾아가 장시간 면담하면서 나름대로 위험성 유무에 관한 판단을 하고, 그 내용을 보안처분심의위원회에서 위원들에게 보고하여야 비로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말로만 설명할 수 있는 사정이겠는가? 이런 과정을 겪으며 나는 비로소 공안사범이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이런 처분을 받게 되는 것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는 공안검사의 눈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보안처분심의위원회의 운영은 오로지 나에게만 부여되어 있던 어려운 임무였다.


    법무부 장관은 “위원회의 의결과 다른 결정을 할 수 없다. 다만, 보안처분대상자에 대하여 위원회의 의결보다 유리한 결정을 하는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법 제17조 제1항)라고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사안마다 법무부 장관에게 상세한 보고를 해야 하니, 일개 평검사가 장관실을 수시로 드나들며 이 보안처분 사안의 보고를 해야 하는 것이 당시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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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황산덕(가운데) 법무부 장관과 김종경(왼쪽) 차관, 서정각(오른쪽) 검찰국장이 주요 현안을 브리핑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당시의 법무부 장관 황산덕 씨는 서울법대 시절 은사였다. 이분께서는 재임 중 사형집행 명령을 한 번도 내린 적이 없었다. 불심이 돈독하여 거의 생불이라 할 만한 자비심을 몸소 실천하시던 분이다. 그러니 보안처분 중 가장 엄한 보안감호가 의결된 사안마다 그 처분의 당연함을 소상히 설명해 드려야만 마지못해 서명하는 것이 통례였다.


    장관께서 제3과장 또는 제4과장을 찾아 설명을 들어야 할 사정이 아니었고, 보안처분을 청구한 제4과의 담당 검사를 불러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행되는 보안처분의 결정권자가 법무부 장관이었으니 그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사회안전법에 법무부 장관은 보안처분심의위원회의 결정보다 가벼운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어서 그 권한을 행사하고 싶어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보안처분 심의위원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이며, 이 위원회의 운영이 과연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나는 직무상 보안처분심의위원회의 대변자일 수밖에 없었으니 참 딱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 장관님께서는 한 번도 위원회의 의결과 다른 결정을 한 바 없었다.


    나는 대학 재학 중 법대 불교학생회의 회장이었으므로 그 은사님 댁을 찾아가 밥도 여러 번 얻어먹었으며, 그분의 영애가 대학 동기 동창생이므로 장관 댁의 가정 사정까지도 잘 알고 있는 처지였다. 지금까지도 그분의 자녀 5남매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송 검사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아야지.”라고 하시며 서명하시던 그 자비로운 모습이 지금도 눈에 어른거린다.


    1년 5개월 정도 그분을 장관으로 모셨으나 1976년 12월 4일 개각으로 문교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 후임으로 이선중(李善中) 씨가 후임 장관으로 취임했다. 이 장관께서는 워낙 치밀한 성품을 지니셨던 분이므로 사안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한 많은 질문이 있었으나 그분 역시 위원회의 의결과 다른 결정을 한 바는 없었다.


    내가 서울지검 검사로 가기 6개월 전쯤 이종원(李鐘元) 씨가 김종경 차관의 후임 차관으로 부임하였다. 어느 날 퇴근을 서두를 무렵, 차관실의 호출이 있었다. 그 방에 들어가서 내가 받은 지시는 다음과 같다.


    “내일 중앙정보부장 주재로 관계 부처 차관이 참석하는 회의가 예정되어 있으니 내일 아침 일찍, 나의 출근 시에 다음 사항을 정리하여 보고해 주기 바란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두 개의 법률을 단일 법률로 통합하여 한 개의 법률안으로 정리한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해 오라.”


    듣고 보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즉시 소속 과장께 그 내용을 보고하였다. 당시의 검찰 제3과장은 검사 중의 검사라는 호칭을 받던 사람으로 강직하기가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들은 체도 않고 그길로 아무 말 없이 퇴근해 버렸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하였을까? 나도 과장의 뒤를 이어 그길로 퇴근했다.


    다음 날 아침 차관실에 불려 갔음은 물론이다. 보고서를 달라는 그 차관에게 내가 한 말은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못 합니다.”였다.


    나의 이런 성품으로 말미암아 그의 장관 재직 중 내가 법무과장으로 근무하던 때, 이런저런 소동이 벌어지게 된다.


    이 차관께서 이렇게 당돌하였던 나를 어떻게 보았던지, 4년이 지난 뒤인 1981년 4월 1일 그가 법무부 장관으로 부임하여 동월 30일자로 시행한 검찰 간부의 인사 발령으로 법무연수원에 근무하고 있었던 나를 직속 부하인 법무부의 법무과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두 번째로 법무부에 근무하게 된 것인데, 이때 그런 일이 벌어진다. 그 내용은 법무과장 시절의 이야기로 기술될 것이다.


    보안처분심의위원회 간사로 근무하던 중 나는 몇 번 대전교도소에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 당시 대전교도소에는 수많은 공안사범이 수감되어 있었다. 보안감호처분 대상자로서 그 처분이 상당한 것인지, 또는 보안감호처분을 받아 수감된 사람들의 보안처분 기간 갱신이 적정한 것인지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것이 그 목적이었으므로 대상자를 상대로 개별적으로 면담하면서 그들의 사상 전향 의사 유무를 가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장의 불이익을 모면하기 위해 위장된 사상전향서를 작성하여 제출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탓이다. 개중에는 끝까지 사상 전향을 거부하면서 어느 세월이 되면 나와 당신의 처지가 바뀔 것이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국방부의 비상군법회의 시절, 8명의 사상범에 대한 사형집행 기억이 생생하였던 나는 그들이 오히려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남아로 태어나 자기가 옳다고 믿는 신념을 당당히 밝히며 검사의 회유에 전혀 흔들리지 않던 모습이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확신범’이라는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그런 용어가 생긴 것인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오랜 기간 사상범으로 복역하면서 끝까지 사상 전향을 거부하였으나 우리 정부의 인도적 배려로 1993년 3월 19일 북으로 송환된 장기수 이인모 씨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북송된 후 그가 북한의 영웅으로 추앙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검찰 제3과에 다른 한 사람의 검사가 있었으나 내가 선임 검사였으므로 나에게 이런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그 검사는 이 업무와는 상관없는 반공유공자 심사위원회의 운영을 주관하고 있었다. 사람에게 벌을 주는 임무가 아니라 유공자를 선정하여 포상하는 것이 주된 임무로서 그 임무는 오히려 유쾌한(?) 것이기도 했다. 맡은 책무에 따라 이렇게 명암이 갈리기도 했다.


    이 시기에 나를 찾아온 서울대학교의 후배가 있었다. 민청학련사건으로 연루되어 내가 직접 조사하였던 사람인데, 나에게 취직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찾아온 것이다.


    그는 이 보안처분대상범죄로 형이 확정되어 그 형의 일부를 복역한 사실이 있으므로 언젠가는 보안처분심의위원회의 의결로 보안처분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보안처분 과정에 선처를 부탁한다는 취지도 없지 않겠지만, 형편이 어려워 찾아온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일개 평검사에 불과한 내가 어떻게 그의 청을 들어줄 수 있었겠는가? 당시에 이런 사람들에게 직장을 제공해 줄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음은 오히려 당연하다. 그의 인품이 원만하여 장래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몇 군데 알아보다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포기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는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정부 산하 기관의 장으로 중책을 맡기까지 하였으니 세월의 변화가 이렇게 무상한 것이다.


    그래서 선인들이 하늘은 녹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祿之人) 지부장무명지초(地不長無名之草)’라고 한 것 아니겠는가?


    나의 검찰 제3과 검사 생활 중 상사로 모신 장관은 황산덕, 이선중, 차관은 김종경, 이종원, 검찰국장은 서정각, 허형구(許亨九) 등 각 두 분이었으며, 과장은 서정신(徐廷信) 1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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