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egaledu
  • 법률신문 오피니언

    참여마당

    [송종의 회고록]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5)

    1부 소묘(素描) ⑤ 실수 연발 ‘노련한 평검사’

    박솔잎 기자 soliping@lawtimes.co.kr 입력 :
    글자크기 : 확대 최소
  • 인쇄
  • 메일보내기
  • 기사스크랩
  • 스크랩 보기
  • 2022_song_book.jpg

     

    경솔하면 실수하고 헛소리하면 뒷감당 어렵다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77. 9. 1. ~ 1980. 6. 11.)


    당시 검찰 종합청사는 덕수궁 옆에 있었다. 청사 내 간부용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다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도 볼 수 있었다. 청사를 두고 검찰 고위 간부가 남북통일에 대비해 건축된 건물이라고 대통령에 보고했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남북통일은커녕 수도검찰이 점차 커지면서 지금의 서초동 검찰청사로 이전한 오늘에 와서 생각해보면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당시 서울지검에는 검사장과 1명의 차장검사로, 내가 부임할 당시에는 밑에 공안부, 형사1·2·3부, 특별수사부, 공판송무부와 사무국, 즉 6부 1국의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소위 공안사범을 다루는 보직에 4년 정도 근무했던 나는 공안부 검사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당시는 공안검사가 영전 또는 승진되는 때로, 검사의 출세 가도로 여겨져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가 된다면 평생 공안사범을 다룰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부임 직전 상사에게 공안부로 발탁되지 않도록 미리 부탁했다. 몇 년간 공안사건들을 처리하며 이미 북한 정보당국에 내 인적사항이 상세히 파악돼 있고, 반드시 제거돼야 할 반동 골수분자로 분류돼 있다는 걸 정보기관으로부터 듣고, 각별히 신변을 신경 써 오던 터였다.


    180063_3.jpg
    ▲1976년 대검찰청 청사 사진 <제공=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서울지검에 가보니 나는 형사제3부 검사였다. 수도검찰청답게 처리하는 사건의 질과 양이 확실히 달랐다. 당시에는 특별수사부가 1개밖에 없는데다 총무부가 없어 형사부에서 특수사건을 처리하거나 기획 업무를 하는 예도 많았다. 다행히 손위 둘째 처남이자 서무과장이었던 문상우(文相羽)씨의 도움으로 엘리트 검찰사무직들을 만나 큰 도움을 받았다. 대검 사무국장을 역임한 정영대(鄭永大)씨와 일반직 수재였던 민병인(閔丙仁)씨가 그들이다.


    당시 나는 부정식품사범 단속을 맡아 서울시경 경찰관과 국립보건연구원 사무관 등 필수 요원을 파견받아 인지수사를 벌였다. 두툼한 경찰 송치사건도 자주 결론을 바꿔야 했으므로 참 고달팠다. 어려운 사건만을 배당한 차장검사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다. 2년 넘게 사건에 파묻혀 살다보니 수사 검사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궁리 끝에 법무부 근무 말년 검찰국장으로 모셨던 허형구(許亨九) 당시 검사장을 찾았고, 공판부로 이동했다. 당시 공판부 발령은 좌천으로 여기던 때였다.


    상사로부터 맞춤 와이셔츠 6벌을 선물 받은 일화를 적어본다.


    좁은 청사 탓에 옆 법원 건물에 더부살이하던 당시 공판부에는 4명의 경력검사와 3명의 초임검사가 있었다. 문제는, 임관 동기생 중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해 서울지검에 발령받았음에도 실무 경험이 부족한 초임검사들을 어떻게 할지였다. 7명이 한방에서 근무한 탓에 그들이 사건 처리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고, 사실상 월권임에도 사사건건 간섭하기 시작했다. 엘리트 검사였던 그들이 사명감을 갖고 지도하는 선배를 이해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이것이 특수부, 중수부를 거쳐 나의 검찰 퇴직시 까지 이어지는 좋은 인연의 시초였다. 이들은 후에 국회의원·법무부 장관 및 서울중앙지검장 등에 올랐다. 박주선(朴柱宣), 김성호(金成浩), 서영제(徐永濟) 등 세 사람이 그들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았던 당시 부장검사가 어느 날 나를 방으로 불러 가보니 양복점 재단사 한 사람이 와있었다. 내게 고마운 뜻을 표하고자 와이셔츠 6벌을 맞춰준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난생처음 맞춤셔츠를 입게 됐다.

     

    인적사항 뒤바뀐 석방 지휘서
    제대로 확인도 않고 서명날인
    징역가야 할 피고인이 풀려나
    차장검사 격려로 7일만에 해결


    이송된 서방파 두목 김태촌
    교활한 자백, 진실로 믿고 기소
    법정서 모두 거짓으로 밝혀져
    검사의 어리석음 속속 드러나


    승려 2명을 ‘횡령죄 고소’ 사건
    스님 말씀 들어보니 ‘적반하장’
    좋은 말로 고소인 타일렀는데
    오히려 나를 상대 진정서 제출


    나의 엄청난 과오들 또한 기록으로 남긴다. 세 개의 사건이 기억에 남아 있다.


    첫 번째는, 구속 기소해야 할 피고인을 잘못 석방시켰다 된통 당한 일화다. 당시 유명 원로정치인이 피해자라 세간의 이목이 쏠려있었던 사건이 있었다. 피의자는 겉모습은 멀쩡했지만 절도 상습범이었다. 그가 훔친 물건을 취득한 사람 역시 공범으로 구속돼 함께 송치됐었다. 그러나 공범인 장물 사범의 경우 범정이 크게 중하지 않았고 사무국 간부의 선처부탁도 있어 약식공소장을 써 그를 석방하도록 사건을 종결했다. 여기서 사고가 발생했다. 내가 서명했던 석방지휘서의 인적사항이 뒤바뀐 것이었다. 사무실 여직원이 실수로 구속 기소해야 하는 절도사범의 인적사항이 적힌 석방지휘서를 내게 올렸는데, 제대로 확인을 못한 채 서명날인을 해버린 것이다. 지시를 전달받은 교도소 입장에서는 이상한 점이 있어도 이행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당시 이 절도 피고인에 대해 징역 7년형을 구형한다는 공판 카드가 작성돼 있었다. 누범 전과로 실형은 불가피했던 상황이었다. 검사라면 마땅히 사표를 써야 할 중대사였다. 그대로 차장검사실로 직행해 전후 사정을 낱낱이 고한 후 석방된 절도범을 다시 검거할테니 급한 사건은 당분간 배당하지 말아 달라고 사정했다. 대형사고를 친 후 당돌한 주문을 하는 내게 당시 차장검사는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려는 듯 꼭 검거하라고 나를 격려했다.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즉시 나는 재검거 작전에 돌입했다. 그날은 마침 봉급날이었는데, 이 사건을 처음 맡았던 서대문경찰서 형사과 형사들을 불러 월급봉투를 모두 털어 이들에게 수사활동비로 주고 핫라인도 구축했다.


    경상도가 주 활동지인 피고인이 잠깐 서울에 올라온 동안 범죄를 저지르고 검거됐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가 붙잡혔던 여관에서 잠복수사를 벌였다. 평소 그가 아끼던 양복 상의가 여관에 아직 남아있다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피고인이 석방된 지 7일째 저녁 여관 주위를 맴돌던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그의 인생은 다시 원위치로 환원된 것이다.


    당시의 차장검사는 안경상(安景相) 씨였다. 나는 차장검사께 다 보고했으니 내가 피고인을 다시 검거하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혼자 책임지라는 당돌한 평검사의 제의를 받은 차장검사가 나였더라면 과연 무슨 대답을 했을까? 내가 그처럼 태연하게 허락해 주었을 것 같지 않다. 오직 경의를 표할 뿐이다.


    두 번째는, 피의자의 교활한 자백을 진실하다고 믿고 기소한 검사의 어리석음이 속속 드러나는 한심한 사건이었다. 당시 나는 우리나라 폭력계의 역사상 큰 획을 그은 서방파 두목 김태촌(金泰村)을 범죄단체의 수괴로 기소했다. 광주지검에서 서울지검으로 이송됐는데, 고참 선배가 고향이 광주라는 점을 들어 회피한 사건이 내게 재배당됐다. 워낙 중대한 사건이라 방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그를 부르는 대신 내가 일과를 마치고 교도소에 찾아가 며칠을 지새웠다. 사형에까지 이를 수 있는 범죄라 피의자 자백은 바라지도 않았는데, 그가 자포자기한 듯 순순히 모든 범죄 혐의 내용을 인정하는 게 아닌가. 너무 구체적이고 범죄 구성 요건에도 딱 맞아떨어져 반신반의하면서도 조서 수백 장을 작성했고, 증거를 보완해 범죄단체조직죄 수괴로 그를 기소했다. 그러나 막상 재판을 진행하다보니, 그가 진술한 시간과 장소 등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다. 내 고등학교·대학교 7년 선배였던 당시 사건 담당 재판장이 나를 부르더니, 피고인이 대단한 폭력배임은 드러났으나 일시와 장소 등이 대부분 사실과 달라 재판부가 공소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미 흐트러진 법관 심증을 바로잡기엔 보완 수사로는 부족했다. 특히나, 범죄 실행행위가 없는데도 모의한 사실만으로 처벌하는 입법취지에 대한 위헌시비가 이어져 법원이 좀처럼 유죄판결을 선고하지 않던 때였다. 하물며 범죄 구성 요건의 기본적 사실인 일시와 장소조차 특정되지 않는 이 사건이 어떻게 유죄의 판결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 두 가지 잘못은 검사가 치밀하지 못해 초래된 대표적 사례다.


    세 번째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생각하면 부끄러운 사건이다.


    피고소인이 승려 2명인 횡령죄 고소사건이었다. 한 분은 고승으로 이름난 조계사 원로 스님이었고, 다른 한 분은 수원 용주사 말사의 주지스님이었다. 경찰에서 무혐의 의견으로 송치한 건이었는데, 고소인이 매일 두툼한 보따리를 들고 검사실을 찾아 새로운 증거를 내밀었다. 두 승려가 사찰에 들어온 시주금을 함부로 사용했으니 처벌해 달라는 것이다. 사찰의 주지나 승려가 용도가 특정되지 않은 신도들의 시주금을 거마비나 사찰운영비로 썼다 해도 문제될 게 없어 고소인을 불러 조사할 필요도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고소인이 매일같이 검사실을 찾으니 그는 물론 피의자인 스님들도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같은 세상이면 그 고명한 스님께서 검찰 소환에 응하지 않았을 텐데, 의외로 순순히 응했다. 스님 말씀을 들어보니, 고소인은 이북출신으로 남한에서 군부대 장교로 근무하다 제대 후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조계사에 신세를 지다 스님의 도움으로 사찰회계 등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고소인이 이런저런 말썽을 부려 더 이상 조계사에 둘 수 없어 부득이 용주사 말사 주지에게 부탁해 생계를 마련해줬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말썽을 부려 내보내게 됐고, 이에 앙심을 품고 스님들을 횡령죄로 고소한 말 그대로 적반하장이었다. 매우 괘씸한 생각이 들어 그에게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스님들의 은공지중해 백골난망인데, 결초보은은 못 할 지언정 이런 배은망덕한 일을 해야겠냐”며 제법 문자를 써 가며 그를 타일러 보려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었다. 그가 ‘추억록’이라 불리는 자신의 장부를 펼친 후 “검사님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십쇼”라고 하기에 또 한 번 말했더니 그 내용을 다 받아 적어 검사실을 나갔다. 그때까지 나는 그가 반성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이 사건이 불기소 처분된 얼마 뒤 서울고검에서 연락이 왔다. 고소인이 항고장과 함께 나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했으니, 진술서를 써 오라는 것이다.


    당시 나는 심정을 표현하고자 진술서에 “앙천부지(仰天俯地) 일편불괴(一片不愧)”라고 적었다. 이를 정정하라는 조언에도 그럴 수 없다며 검사실을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 처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사건 당사자가 설령 은혜를 저버렸다 한들, 검사가 무슨 권한으로 그를 타이르겠는가. 이 뿐 인가, 잘못을 지적하는 검찰 선배에게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보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진술서를 썼다.


    나이 80을 바라보는 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데, 40도 안 된 나이에 저만 옳다고 발끈하여 돌아선 너는 도대체 누구냐?


    180063.jpg

     

     

    내가 서울지검 검사로 재직 중 상사로 모신 검사장은 김윤근(金潤槿), 허형구(許亨九) 두 분이었으며, 차장검사는 정명래(鄭明來), 김석휘(金錫輝), 안경상(安景相), 백광현(白光鉉) 등 4분이었다.


    최근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