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egaledu
  • 법률신문 오피니언

    참여마당

    [송종의 회고록 전문 (5)]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

    1부 소묘 (素描) ⑤ 실수를 연발하는 노련한 평검사

    박솔잎 기자 soliping@lawtimes.co.kr 입력 :
    글자크기 : 확대 최소
  • 인쇄
  • 메일보내기
  • 기사스크랩
  • 스크랩 보기
  • 2022_song_book.jpg

     

    경솔하면 실수하고 헛소리하면 뒷감당 어렵다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77. 9. 1. ~ 1980. 6. 11.)


    내가 서울지방검찰청의 본청에 발령받아 근무한 기간은 위에 명시된 바와 같이 2년 9개월이 넘는다. 나의 경력상 한 개의 직책으로 근무한 기간이 가장 길었던 때이다.


    당시 서울지방검찰청은 덕수궁 옆에 있던 소위 검찰 종합청사에 들어서 있어서 대검찰청, 서울고등검찰청과 서울지방검찰청이 모두 이 건물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검찰 종합청사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건물 북측의 현관에 들어서서 왼쪽의 간부용 엘리베이터로 향하다 보면, 가운데 기둥의 동쪽 면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인 ‘國家紀綱의 確立’이란 글이 오석(烏石)에 새겨져 걸려 있었다.

     

    이 건물의 준공 시에 검찰 고위 간부가 이 건물이 남북통일에 대비하여 건축된 검찰종합청사라고 대통령께 보고하였다는 내용을 들은 바 있다. 남북통일은커녕 수도검찰이 점점 체중을 늘려 가면서 이 청사가 도저히 그 인원과 시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강남에 서초동 검찰청사를 건립하여 서울고등검찰청과 서울지방검찰청이 먼저 이주하고, 곧이어 대검찰청도 그 건너편에 자리를 잡아 신축되었다.

     

    서울지검과 서울고검이 함께 들어서 있던 그 신축청사마저도 협소해지자 그 뒤에 서울고등검찰청의 새로운 청사가 들어서게 된 오늘에 와서 생각해 보면, 검찰 종합청사 준공 시에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에 실소를 금할 길이 없다.

     

    나의 근무 기간이 길었던 것처럼 내가 서울지검의 평검사로 겪은 일 또한 많다.

     

    당시의 서울지검의 조직을 보면 검사장 밑에 1명의 차장검사가 있었을 뿐이다. 2명의 차장검사가 있었던 적이 있었으나 그 뒤에 검찰청 사무기구에 관한 규정의 개정으로 차장검사의 수가 다시 1명으로 되었고, 다시 이 규정이 개정되어 그때부터 3명의 차장검사 시대가 열렸다. 내가 부임할 당시에는 공안부, 형사1·2·3부, 특별수사부, 공판송무부와 사무국, 즉 6부 1국의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법무부에서 서울지검으로 발령이 났기에 혼자 생각해 보니 나는 공안부 검사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나의 경력 중 국방부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관과 법무부 검찰 제3과 검사의 경력이 4년 정도 되는 기간인데, 위 두 직책 모두 소위 공안사범을 다루는 보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공안검사가 출세 가도를 달리는 검사의 필수 과정으로 여겨질 만큼 인기가 높았다. 이 검사 중 많은 검사가 영전 또는 승진되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해 보니 이번에 서울지검의 공안부 검사가 된다면 명실상부한 공안검사로 될 수밖에 없어서 잘못하다가는 평생 공안사범을 다룰 가능성도 있었다. 몇 년간 겪어 본 경험에 미루어 보면 이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이었다.


    게다가 내가 처리한 공안사건들로 인하여 이미 북한의 정보당국에 내 인적 사항이 상세히 파악되어 있고, 또 적당한 기회에 반드시 제거하여야 할 반동 골수분자로 분류되어 그 명단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정보기관으로부터 들었던 것이므로 신변에 관하여 각별한 신경을 써 오던 터였다.

     

    180063_3.jpg
    ▲1976년 대검찰청 청사 사진 <제공=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하여 나는 서울지검 부임 직전에 말이 통할 만한 상사에게 특별히 청하여 서울 본청의 공안부 소속 검사로 발탁되지 않도록 미리 부탁해 두었다. 서울지검에 부임하여 보니 나는 형사 제3부 소속 검사로 부 편성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내심 안도했다.


    서울지방검찰청이 과연 수도검찰청답게 사회의 이목을 끄는 각종 중요 사건을 처리하는 검찰청임을 즉시 알 수 있을 만큼 사건의 질이나 양이 내가 거쳐 온 검찰청과는 현격히 달랐다. 당시 서울지검에는 특별수사부가 1개의 부서에 불과한 데다 총무부가 설치되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특별수사부에서 처리할 만한 사건을 형사부에서 처리하는 예가 많았고, 또 총무부에서나 해야 할 각종 기획 업무를 형사부 소속 검사가 차장검사의 명을 받아 수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당시 서울지방검찰청의 서무과장이 문상우(文相羽) 씨였다. 그분은 나의 손위 둘째 처남이다. 이분께 내방에 배치될 검찰사무직원을 특별히 인선해 달라고 요청하여 나와 함께 일할 검찰사무직 주사가 차례로 선발되었다. 이들은 고등고시에 합격한 경력만 없을 뿐, 검찰사무직의 최고 엘리트여서 근무 기간 내내 큰 도움을 받았다. 나중에 검찰사무직의 총수인 대검찰청 사무국장을 역임한 정영대(鄭永大) 씨와 검사보다 더 날카로운 시각으로 수사를 도와준 민병인(閔丙仁) 씨가 그들이다.


    평검사로 점차 차장검사의 신임을 얻게 되자 각종 기획 업무가 수시로 하명되어 이 일을 처리하느라 배당된 사건을 직접 조사할 여유가 없었다. 사건관계자를 소환하여 몇 마디 물어본 후 이들에게 지시하면 내가 조사한 것보다 월등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나는 거의 그들이 작성한 기록만 살펴보고 결정문만 쓰면 될 정도였으므로 그나마 상사가 수시로 하명하는 청 운영 전반의 기획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다.


    당시 나의 분장 사무는 부정식품사범의 단속이었는데, 상사의 명에 따라 서울시경 소속 경찰관과 국립보건연구원의 사무관 등 필수 요원을 내 사무실로 파견받아 그들과 함께 부정식품사범의 인지수사를 벌여야 했다. 이 와중에 내게 배당되는 두툼한 사건 중 상당수의 사건이 결론을 바꾸어야 했으므로 고달픔이 따르는 건 당연했다.
    구속된 사건 피의자는 무혐의로 석방하고, 혐의 없음 의견으로 불구속 송치된 두툼한 사건은 심심치 않게 구속하여 기소해야 하니 이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송 검사에게 그 사건을 배당했던 거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차장검사가 원망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검사라면 이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금방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2년 남짓 이런 사건 속에 파묻혀 세월을 보내야 했으니 수사 검사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런 형사부 소속 검사로 더 일하다가는 정말 제명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궁리 끝에 검사장실을 찾았다. 당시 검사장은 내가 법무부 검찰 제3과 근무 말년에 검찰국장으로 모셨던 허형구(許亨九) 씨였다.


    드디어 형사부를 탈출(?)하여 공판부 검사가 되는 길이 열렸다. 서울지검 검사 대부분이 공판부를 한직으로 생각하여 공판부 검사가 되면 마치 좌천을 당한 것으로 여기던 때였다.


    인적사항 뒤바뀐 석방 지휘서
    제대로 확인도 않고 서명날인
    징역가야 할 피고인이 풀려나
    차장검사 격려로 7일만에 해결

     

    이송된 서방파 두목 김태촌
    교활한 자백, 진실로 믿고 기소
    법정서 모두 거짓으로 밝혀져
    검사의 어리석음 속속 드러나


    승려 2명을 ‘횡령죄 고소’ 사건
    스님 말씀 들어보니 ‘적반하장’
    좋은 말로 고소인 타일렀는데
    오히려 나를 상대 진정서 제출

     

    공판부 검사가 된 덕분에 상사로부터 6벌의 와이셔츠를 맞추어 입게 된 일화를 적어 본다.


    공판부는 검찰 종합청사에 있지 않고 청사 옆 법원 건물의 일부를 빌려 쓰고 있었다. 부 소속 검사는 7명이었는데 4명은 초임 검사가 아닌 경력 검사였고, 3명은 서울지검이 초임인 검사들이었다. 내가 검사로 임관될 당시는 초임 검사를 본청으로 발령하지 않았으나 이때는 임관된 검사의 성적순에 따라 몇 명이 서울 본청 검사로 발령받던 때였다.


    이 초임 검사들이 임관 동기생 중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서울지검에 발령받았으나, 실무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공판에 임하여야 할 중요한 사건이 많이 배당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이들이 아무리 두뇌가 명석하다 해도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므로 초임 검사를 서울 본청에 발령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나의 임관 당시 서울지검장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검사 7명이 한방에서 근무하였으므로 그들이 사건을 처리하는 내용도 엿볼 수 있었는데,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은 일이 더러 눈에 띄었다. 내가 상석 검사였고 부장실은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서 부장검사에게 이를 고자질할 수도 없는 형편이므로 내가 권위를 내세워 이들을 가르치면서 사사건건 간섭하기 시작했다. 사실 월권인 셈이었다.


    다행히 세 명의 검사는 모두 엘리트였으며, 내가 사명감을 가지고 지도하는 것으로 이해해 주었으므로 이런 일이 가능했다. 이들은 세월이 흘러 내가 법무부 법무과장직을 마치고 서울지검에 돌아와 특별수사부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당시 서울지검 소속인 2명이 특수부 검사로 발탁되었고, 후에 국회의원, 법무부 장관 및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 등 요직을 역임하게 된다.


    박주선(朴柱宣), 김성호(金成浩), 서영제(徐永濟) 등 세 사람이 그들이다.


    이런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당시의 부장검사께서 어느 날 나를 부장실로 부르기에 가 보았더니 양복점의 재단사 한 사람이 와 있었다.


    “내가 송 검사에게 고마운 뜻을 표하는 의미에서 와이셔츠 6벌을 맞추어 주려고 이 재단사를 불렀으니 신체 치수를 재도록 하시오. 검사가 멋을 부리지는 않더라도 옷은 제대로 맞추어 입어야 하는데 와이셔츠 6벌로 매일 한 벌씩 바꾸어 입는다면 일주일 내내 산뜻한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으니 6벌을 맞추어 주는 것이오.” 이런 경위로 나는 난생처음 내 신체 치수에 맞는 새 와이셔츠 6벌을 색상과 재질을 달리하여 맞추어 입게 되었다.


    내가 형사부 검사 시절 저질렀던 엄청난 잘못을 되새겨 기록으로 남긴다.


    검사가 사건 처리를 잘해서 끝까지 잘 마무리되었다면 이는 너무도 당연하므로 이를 자랑삼아 늘어놓는다면 자신만의 한심한 무용담에 그칠 뿐, 뒷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사건들은 이미 나의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내가 저지른 잘못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여 이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세 개의 사건이 기억에 남아 있다.


    첫 번째 사건은 절도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보통 절도사건이 아니라 사회의 이목을 끌던 명사가 피해자인 절도사건이었다. 그 피해자가 우리나라 원로정치인으로서 일세를 풍미한 저명인사였고, 그 피해품 역시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구속된 피의자는 전혀 도둑놈처럼 생긴 사람이 아니라 어쩌면 의젓한 신사로 보일 정도로 용모가 단정하고 검거될 당시의 옷차림도 말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기와는 달리 그에게는 수많은 절도 전과가 있어서 속칭 절도 상습범이었다.


    그가 훔친 물건을 취득한 사람 역시 구속되어 함께 송치된 사건이 문제의 사건이다. 그런데 구속 송치된 이 장물 사범에 대하여 선처를 부탁하는 사무국의 간부가 있었다. 사건을 조사해 보니 범행이 명백하고 증거도 충분하였으므로 구속된 절도범을 구속기소하고, 장물 사범은 법정이 크게 중하지 않아 벌금형에 처하도록 약식공소장을 써서 결정 당일 석방지휘서에 서명하여 사건을 종결하였다.


    내가 그 사건을 청탁한 사람에게 사건 처리 결과를 알려 주지 않았던지, 그 결정이 이루어진 며칠이 지난 뒤 나를 찾아와 다시 선처를 청탁하는 것이었다. 이미 나는 그의 희망대로 그 장물 사범을 석방하였는데 다시 찾아와 내게 청탁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미 그 사건이 원만히 처리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가 다시 찾아와서 하는 말이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 장물 사건의 피의자는 석방되지 않은 채 아직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한 일이었으므로 어떻게 이런 결과가 생긴 것인지 조사해 본 결과, 이 사건 처리가 크게 잘못된 것을 발견했다.
    검사가 사건결정문을 써서 사무실의 여직원에게 주면 그는 그 내용대로 공소장이나 약식공소장 또는 불기소장을 찍어 검사의 도장을 받아 부장검사실로 보내고, 부장실의 결재를 거쳐 대부분 차장검사의 전결로 사건이 마무리된다.


    구속된 피의자가 석방되는 때에는 그 여직원이 미리 찍어서 함께 결재 서류에 끼워 준 석방지휘서에 검사가 서명하고 날인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이 여직원이 타자로 찍은 석방지휘서에 석방될 피고인의 인적 사항이 뒤바뀐 것이다. 풀어 줄 사람이 아닌 구속 기소하는 피고인의 인적 사항을 석방지휘서에 찍어 내게 결재를 올린 것인데, 나로서야 당연히 석방될 장물 사범의 석방지휘서인 줄로 알고 서명날인을 해 버렸다.


    이 석방지휘서가 교도소에 전달되었으니, 받아 보는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더라도 그 지휘서에 명시되어 있는 사람을 석방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런 경위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아야 할 절도 상습범은 즉시 석방되었고, 교도소 문을 나가야 할 사람은 석방되지 못한 채 수감되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석방한 이 절도 피고인에 대하여는 징역 7년 형을 구형하는 내용의 공판 카드가 작성되어 있었다. 더구나 이 피고인은 누범 전과로 인하여 반드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해야만 했던 사람이었으니 이 엄청난 실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검사라면 마땅히 사표를 써야 할 중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해서 될 일도 아니므로 잠시 생각한 후 차장검사실로 직행했다. 전후 사정을 낱낱이 고한 후 석방된 절도범을 다시 검거하는 것이 시급하니 검사장에 대한 보고를 늦추어 주고 급한 구속 사건을 당분간 배당하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였다.


    이것이 당돌하기 짝이 없는 주문이었던 이유는, 나는 차장검사에게 보고하였으니 차장검사께서 책임을 지고 혼자만 알고 있으라는 내용인 동시에 검거 가능성이 100%라고 장담할 수 없는 사람을 검거하려 하니 당분간 내게 일을 시키지 말라는 취지였기 때문이다.


    정색을 한 차장검사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도 감명 깊다. “송 검사의 청을 들어 그대로 할 테니 꼭 검거하시오.”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지겠다고 하며 부하 검사를 격려하던 그 모습이 어찌 감명 깊지 않겠는가? 급히 내려와 처리된 사건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니 다시 검거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이 사건 피고인을 처음 검거하였던 서대문경찰서 형사과의 경찰관 2명(외근 형사는 2명이 1조로 활동하는 것이 관행이었다)을 검사실로 불렀다. 그들의 진술을 자세히 들어 본 다음 내가 수사반장이 되어 검사실에 수사본부를 차리고 본격적인 검거 활동에 들어갔다. 마침 그날은 봉급날이었다. 내 월급봉투를 모두 털어 그 돈 전액을 두 경찰관에게 남김없이 수사활동비로 내주었다.


    서대문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들에게 당분간 다른 임무를 주지 말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그다음 경찰관들의 검거 활동 중 경유하여야 하는 여러 검찰청의 동료 검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 경찰관들의 교통수단을 마련해 주고, 검사실에서 검찰 전화로 나에게 직접 통신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하도록 부탁했다. 그 당시는 검사실에 일반전화도 없었으며 휴대전화도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 피고인은 경상도 일원을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다. 잠깐 서울에 올라와 청진동에 있는 여관방에 투숙하면서 원로정치인과의 사적 인연을 내세워 그 집을 방문하여 서로 환담하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응접실에 있던 값진 물건 하나를 슬쩍해 나온 것이었다.


    이 사람은 워낙 옷차림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으로서 항시 아껴 입는 양복 상의가 있었다. 그 여관에서 검거될 당시 이 물건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여 그 물건이 아직 그 여관에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것을 다시 찾으려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다른 검거 조를 편성하여 이 여관 주위의 동태를 살피도록 조치했다.
    경찰관 2명이 즉시 경상도 지방으로 내려가 그의 연고지를 추적한 내용을 보고받아 보니, 그의 행선지가 차례로 드러나기는 하였으나 약 3일 뒤늦게 그의 뒤를 쫓아가는 상황이 파악되었다. 최종 행선지에서 상경한 듯한 정황이 포착되므로 서울의 청진동 여관 담당팀에게 주의를 환기시켜 더욱 철저히 감시하도록 지시했다.


    그 피고인이 석방된 후 7일이 지난 날 저녁, 드디어 그는 자신이 남겨 둔 옷을 찾기 위해 주위를 살피며 여관 주위를 맴돌다가 드디어 여관에 나타났다. 그것으로 그의 인생은 다시 원위치로 환원된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7일간의 귀휴 여행(?)을 즐긴 후 다시 영어의 몸이 되었다.


    당시의 차장검사는 안경상(安景相) 씨였다. 나는 차장검사께 다 보고했으니 내가 피고인을 다시 검거하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혼자 책임지라는 당돌한 평검사의 제의를 받은 차장검사가 나였더라면 과연 무슨 대답을 했을까? 내가 그처럼 태연하게 허락해 주었을 것 같지 않다. 오직 경의를 표할 뿐이다.


    두 번째 사건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사건이다.


    어느 날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불구속 사건 하나가 배당되었다. 마음속으로 이 사건은 아주 지저분한 사건임에 틀림없겠다고 생각하고 기록을 넘겨보니 이건 보통 사건이 아니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중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한 사건인데, 그 피의자가 그 범죄단체의 수괴라는 내용의 사건이었다. 그 피의자가 우리나라 폭력계의 역사상 큰 획을 그은 김태촌(金泰村)이란 사람이다.


    이 사건은 광주지방검찰청에서 이송된 것이다. 위 피의자가 당시 서울 관내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으므로 서울로 이송되었고, 본청의 호봉 높은 모 검사가 그 관련 사건을 가지고 있어서 그에게 배당되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는 광주 지역 출신이어서 이 사건 처리가 어렵다는 부당한 이유를 내세워 재배당을 요청함으로써 이 사건이 내게 배당된 것임을 사후에 알게 되었다. 그 검사는 평검사 중 최고참 선배였으므로 이를 항의할 처지가 되지 못하여 부득이 내가 처리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 사건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이다. 이 사건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피의자가 우리나라 폭력계의 대부로 지목되는 사람일뿐더러 그 범죄 혐의가 매우 중대하여 수사 자체가 극히 어려워 간단한 범죄 사건 100건의 수사보다 이 1건의 수사가 훨씬 더 힘든 사건이었다.


    기록을 살펴보니 광주의 경찰에서도 이 사건을 능동적으로 인지하여 수사한 것이 아니라 각종 고소와 진정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수사하면서 김태촌 한 사람만을 범죄단체인 서방파(瑞坊派)의 두목으로 범죄 사실을 구성하여 서울로 보낸 것임이 분명했다.


    그를 검사실로 불러 수사하다가는 범죄의 내용이 방대하여 퇴근 시간을 넘기는 일이 잦을 것으로 예상되고, 그를 호송한 교도관의 불편이 이만저만 아닐 것이므로 내가 일과 시간 후 교도소에 찾아가 며칠 동안 그를 조사하게 되었다.


    이런 사건의 경우 피의자가 순순히 자백할 리가 없다. 혐의 내용이 워낙 중대하므로 이런 혐의 사실을 순순히 자백하여 범죄단체의 수괴로서 처형된다면 사형에까지 이를 수 있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태촌은 달랐다. 마치 자포자기한 듯한 태도로 거의 모든 범죄 혐의 내용을 거의 순순히 자백하였다.


    그가 자백한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고, 또 범죄의 구성 요건에 거의 맞아떨어지는 내용이었으므로 반신반의하면서 그에 대한 조서 수백 장을 작성하게 되었다. 이곳저곳에 수감되어 있던 관련자들의 경찰 조사 내용도 이에 거의 부합되었으므로 몇 가지 의심스러운 사실만을 간간이 확인하면서 증거를 보완하고, 마침내 그를 범죄단체조직죄의 수괴로 인정하여 공소를 제기했다.


    그 단계에 이르기까지 내가 소비한 시간과 정력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재판을 진행하다 보니 김태촌이 진술한 내용 중 범죄단체조직죄의 구성 요건에 해당되는 행위 사실의 일시와 장소가 모두 거짓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예컨대, 자신이 수감되었거나 행선이 분명하여 그 일시와 장소에서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던 분명한 사정, 즉 알리바이가 곳곳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범죄가 될 내용의 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일시와 장소가 모두 이런 식으로 판명되기에 이르니 재판부가 검사의 공소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 사건을 담당하였던 합의부의 재판장은 내 고등학교, 대학교의 7년 선배였다. 나를 부르시더니 이 피고인이 대단한 폭력배임은 분명히 드러났으나, 우선 형식상의 요건인 일시와 장소가 대부분 사실과 달라서 재판부에서 공소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의견을 들었다. 내가 아무리 보완 수사해 보아도 이미 흐트러진 법관의 심증을 바로잡을 도리가 없음을 알았다. 공소장 변경조차 거의 의미가 없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피의자의 교활한 자백을 진실하다고 믿고 기소한 검사의 어리석음이 속속 드러나는 한심한 사건이었다.


    원래 이 범죄단체조직이란 죄는 범죄의 실행행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의한 사실만으로 그 죄의 정한 형으로 처벌한다는 것이 그 죄의 입법 취지이므로 옛날부터 위헌 시비가 끊이지 않은 탓에 법원에서는 좀처럼 이 범죄로 유죄판결을 선고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의 사법사상 이어져 온 전통이었다. 하물며 범죄 구성 요건의 기본적 사실인 일시와 장소조차 특정되지 않는 이 사건이 어떻게 유죄의 판결을 받을 수 있겠는가?


    검사가 피고인이 날린 한두 번의 잽과 같은 펀치에 그로기가 되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공소장 변경도 의미 없는 것이었으며, 항소 또한 의미 없는 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김태촌, 이 사람은 나와 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었는지 모르나 내가 대검 강력부장으로 근무하면서 범죄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서울지방검찰청 강력부에 구속되어 다시 영어의 몸이 되었다.


    강력부에서 이 사건을 수사하는 동안 내가 겪은 실수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후배 검사들에게 세세한 부분까지 직접 수사 지휘를 하게 된 나의 사정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다.


    위에 든 두 가지 사건은 검사가 치밀하지 못하였으므로 초래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자허원군께서 『성유심문』에 이른 ‘과생어경만(過生於輕慢)’, 즉 경솔하면 잘못된다는 말의 뜻을 깊이 되새기게 하는 나의 크나큰 실수였다.

    세 번째 사건은 횡령죄의 고소 사건이다.


    경찰에서 무혐의 의견으로 송치된 사건이었는데, 피고소인 두 명이 승려였다. 한 분은 당대의 고승으로서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조계사(曹溪寺)의 원로 스님이었고, 다른 한 분은 수원 용주사(龍珠寺) 말사의 주지 스님이었다.


    이 사건이 송치되자마자 고소인이라는 사람이 거의 매일같이 두툼한 보따리를 들고 검사실을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당사자의 소환 일정을 물어보며 여러 번 진정서를 놓고 가기에 사건 기록을 검토해 본 결과, 위 두 승려가 사찰에 들어온 시주금을 함부로 사용하였으므로 이는 전부 횡령죄에 해당되니 처벌해 달라는 내용의 고소 사건이었다.


    사찰의 주지나 승려가 용도가 특정되지도 않은 신도들의 시주금을 거마비나 사찰운영비로 썼다 해서 죄가 될 리가 없음은 당연하므로 사실 고소인을 불러 조사할 필요도 없는 사건이었다. 사건 자체가 이런 내용이었으므로 경찰에서도 극히 형식적으로 사건을 조사한 후 무혐의 의견으로 송치하였는데, 피의자 한 사람이 이 나라 불교계의 원로 스님으로 명시된 사건이었다.


    고소인이 검사실에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사실이라면서 이런저런 서류를 제출하니 그를 조사하여야 함은 물론, 피의자인 그 스님들도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요즈음 같은 세상이라면 그 고명한 스님께서 검사의 소환에 응하여 출두할 가능성도 별로 없다. 그러나 그 원로 스님께서는 나의 소환에 순순히 응하여 검찰에 출두하셨다. 이런 망신을 주기 위해 고소인은 여러 번 검사실을 찾아와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피의자에 대한 엄정한 조사와 신속한 소환을 재촉하면서 피의자의 소환 일정을 물어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스님의 말씀을 들어 본 결과, 고소인은 이북에서 혈혈단신으로 피난을 와 군에 입대하여 장교로 진급했던 사람이었다. 고소인은 위 원로 스님이 전방의 어느 사찰의 주지를 맡고 있을 당시 군부대의 장교로 근무하면서 알게 되었다. 제대 후 마땅한 호구지책을 마련할 수 없어서 조계사를 찾아가 거처를 부탁하였던 모양이다. 그 스님께서 고소인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조계사에 거처를 마련해 준 다음 오랫동안 사찰회계 등 여러 가지 일을 맡아 처리하도록 해 준 것이 이 사건이 초래된 빌미가 되었다.


    이 고소인이 이런저런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므로 부득이 조계사를 내보내면서 용주사 말사의 주지에게 부탁하여 그 생계를 마련해 주도록 당부하였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 있듯이 그 사찰에서도 이 사람이 또 이런저런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자 할 수 없이 그를 내보내기에 이르렀다. 이에 앙심을 품고 그 스님들을 횡령죄로 고소하였으니 말 그대로 적반하장이었다. 경찰 기록에는 없었던 이런 내용을 소상히 들어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은 매우 독특한 특징이 있는 사람이었다. ‘추억록’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붙인 두툼한 장부 같은 노트를 항시 들고 다녔다. 이 장부책에는 추억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사소한 모든 내용이 깨알같이 들어 있었다.


    그간의 태도로 미루어 보면 이 사람은 반드시 항고할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겸사겸사 그를 앉혀 놓고 조사하기 시작했다. 위 스님들과 인연을 맺은 사실을 집중적으로 캐물은 결과, 고소인도 그런 인연이 있었다고 시인하므로 매우 괘씸한 생각이 들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有分數)지, 스님들의 은공지중(恩功至重)하여 백골난망(白骨難忘)인데, 결초보은(結草報恩)은 못 할지언정 이런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일을 해서야 쓰겠는가?”라고 제법 문자를 써 가며 그를 타일러 보내려 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추억록을 펼친 후 “검사님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하기에 아마 반성하는 뜻에서 그런가 보다 하고 가볍게 생각하여 또 한 번 앵무새처럼 말했더니, 그는 추억록에 그 내용을 다 받아 적은 후 검사실을 나갔다.


    이 사건이 불기소처분된 얼마 뒤에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의 전화가 있었다. 고소인이 항고장과 함께 송 검사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하였으니 사건 처리의 전말에 관한 진술서를 써 오라는 것이었다. 검사 생활 중 두 번째로 피진정인이 된 것이다. 즉시 진술서를 작성하여 그 검사실을 찾아갔다.


    내가 쓴 진술서를 읽어 보던 그 검사가 나에게 이 부분을 고치면 좋겠다고 지적한 내용이 있었다. 그 부분은 ‘앙천부지(仰天俯地) 일편불괴(一片不愧)’라고 쓴 여덟 글자였다. 나는 내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여 나의 명의로 내가 작성한 문서이므로 그 글자는 삭제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그 검사실을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 처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사건 당사자가 설령 옛날의 은혜를 저버리고 배은망덕한 고소를 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여기고 말이지, 그 사람에게 그렇다고 꼭 말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며, 검사가 무슨 권한으로 그를 타이르려 한단 말인가?


    이것도 잘못되었는데, 이 잘못을 지적하는 검찰 선배에게 나는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보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건방진 내용의 진술서를 썼다. 이를 고치라는 지적까지 받았으나 이에 응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무엇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인가?


    나이 80을 바라보는 나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데, 40도 안 된 나이에 저만 옳다고 발끈하여 돌아선 너는 도대체 누구냐?


    제법 유식한 체하면서 한문 4글자를 섞어 말하고 글을 쓴 결과, 이런 일을 겪게 된 것이다. 경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경찰의 수사권 독립에 관한 내용을 적어 둔다. 나의 공판부 검사 근무 시절, 이런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어 큰 사회적 이슈가 되기에 이르렀다. 검찰 수뇌부의 지시에 따라 서울지검장이 책임을 지고 이 사태를 수습하도록 특명이 내려졌다. 이 책임을 맡은 부장검사는 내 소속 부장검사가 아니었으나 검사장의 명에 따라 송 아무개가 차출되었다.


    내가 이 일을 혼자 처리할 수 없으니 한 명의 검사를 보강해 달라고 상부에 건의하였다. 내가 차출해 달라고 요청한 검사는 명문고 출신인 나의 법대 후배로 해외 유학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인천지청에서 검사직무대리로 근무할 때부터 나를 찾아와 고등고시 합격의 비결을 물어 오던 검사였다.


    그가 합격한 뒤 검사로 임관되고 나서 나와 한 직장에 근무하면서도 때로는 내게 당돌하게 대들기도 했던 검사였다. 원래 준마는 길들이기가 어려운 것이지 한번 길을 들이고 나면 준마 구실을 한다는 것이 예부터 있어 온 말이다.


    이 검사와 함께 낮에는 사무실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저녁에는 검찰청 인근의 호텔 방에 들어가 사태 수습 방안을 수립하는 데 골몰하였다. 그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청춘 남녀가 옆방에서 운우의 정을 나누는 교성이 들려오는 그 호텔 방에서, 두 검사는 대책 마련에 골몰하면서 다방면의 대책을 수립·시행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만들어 상부에 보고하였다. 며칠간이나 그 일이 계속되어 한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간간이 집을 찾아가 옷을 갈아입고 오면서 이 사태에 대처하여 결국 사태는 진정되었다.


    순한 양처럼 검사의 지휘에 복종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수십 년간 사법경찰 관리의 충실한 임무를 수행해 왔던 경찰의 이런 태도를 보면서 나는 비로소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점차 알게 된 것이다. 검찰의 정사(正史)에는 한 줄도 기록할 수 없었던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 바로 이 기록이다.


    화택(火宅)이라 할 만한 형사부를 피해 공판부로 피난(?) 갔던 검사가 겪게 되는 이런 일은 결국 팔자소관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 일을 처리할 적임자로 선택된 객관적인 이유는 있다.


    서울지검 검사 시절인 1979년 4월 16일부터 5월 15일까지 1개월간 나는 당시의 대검 송무담당관인 이명희(李明熙) 검사장을 모시고 평검사인 이명재(李明載) 검사와 세 사람이 한 팀을 이루어 선진국 형사사법제도를 시찰한 바 있고, 그 내용을 3인의 연명으로 된 장문의 보고서로 만들어 검찰에 남겨 놓은 적이 있었다.


    이것이 아마도 이 사건을 해결할 적임자로 점찍히게 된 또 한 가지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기억력이 탁월했던 명민한 이명재 검사의 기억에 따라 대부분 그의 손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180063.jpg


     내가 서울지검 검사로 재직 중 상사로 모신 검사장은 김윤근(金潤槿), 허형구(許亨九) 두 분이었으며, 차장검사는 정명래(鄭明來), 김석휘(金錫輝), 안경상(安景相), 백광현(白光鉉) 등 4분이었다.


    정명래 차장은 내가 비상군법회의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 원소속 청이던 성동지청의 지청장이었다.


    1979년 2월 26일 검찰청 사무기구에 관한 개정령(대통령령 제9351호)에 따라 본청 차장검사의 수를 1인에서 3인으로 증원하고, 그 분장 사무를 처음으로 법제화(동일자로 검사정원법 시행령을 개정, 대통령령 제9353)하여 본청에 총무부가 신설되고, 특별수사부가 3개 부로 확대 개편되어 공판부가 제1차장검사 소속 부서로 변경됨으로써 백광현 차장검사를 상사로 모시게 되었다.


    이분은 내가 법무부 법무과장직을 맡았을 때 직속상관인 법무실장이었으며, 훗날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최근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