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결정적인 증거가 있습니다.”재판연구원 임기를 마치고 고용변호사로 일할 때다. 민사소송 제1심을 맡긴 의뢰인이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승소로 가는 ‘치트키’까지는 아니었지만, 이만하면 꽤 ‘똘똘한’ 간접사실 하나를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무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얼른 제출하시죠”라고 했다. 당시 초짜(?) 변호사였던 나보다 훨씬 오랜 세월 법원 주변을 맴돌았던 그는, “변호사님이 뭘 모르시네”라고 핀잔을 줬다. 항소심에 대비해 속된 말로 “꼬불쳐놓아야 한다”라고 했다. 적시제출주의(민사소송법 제146조)가 떠올랐지만, ‘두 번째 판’인 항소심에서 온힘을 쏟아야지 상대방의 반격 기회를 봉쇄할 수 있다고 믿는 그에게는 별로 통할 것 같지 않았다.예전 의뢰인을 떠올리게 된 건 지난달 열린 사법행정자문회의 회의록을 보면서다. 항소심 제도 개선 방안 몇 가지가 테이블에 올랐지만 논란 끝에 끝내 자문의견으로 확정되지 못했다. 제1심 충실화와 항소심의 사후심화는 1994년 사법제도발전위원회에서 심급제도의 이상으로 제시된 이래 28년째 그 방향으로 가자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지만, 피부에 와 닿는 정도의 진전은 없었다. 심급 간 역할 분담이 제대로 안되다보니 빠른 권리구제에 장애가 된다. 소송하면 으레 항소심까지는 무조건 가는 것으로 생각하다보니 전체 사건처리 기간이 두 배로 늘어난다.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재판하다 날 샌다’고 느낄 법하다. 사법자원의 효율적인 배분 측면에서도 좋지 않다. 판사와 재판연구원 수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것 자체가 난망한 일이지만, 혹여 가능하다 해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될 수 있다. 이번에도 논의 초기 항소심의 독자적인 실권효 등 28년 묵은 ‘아이디어’들이 모두 제시되었으나 분과위원회 단계에서 쓸려나가고 전체회의에는 오르지 못했다. 민사 분야 항소이유서 제출 의무화와 항소심 1회 기일 변론 종결 가능 규정 신설, 형사 분야 무변론항소기각 판결 제도 도입 및 1심 판결이유 인용 범위 확대 등이 남았으나 이마저도 외부위원들의 우려에 부딪힌 것 같다. ‘제1심 충실화’의 수준이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에서 항소심의 사후심적 성격만 강화하면 자칫 억울한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우려도 경청할 부분은 있다. 그렇지만 모두가 만족하는 수준까지 제1심을 충실화하고 난 다음에야 항소심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은 그냥 지금 이대로 간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도저도 아닌 항소심 운용은 결국 제1심 집중을 어렵게 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형 증거개시(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 제1심 충실화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 항소심의 제도적 사후심화가 패키지로 돌아가야만 이상적인 심급 간 역할 분담이 이뤄질 수 있다. 차기현 (광주고등법원 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