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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승철의 문향(文香) 오디세이

    [고승철의 문향(文香) 오디세이] 이어령, 정명환… 두 거목의 잔향

    고승철 언론인·저술가(전 동아일보 출판국장)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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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문화예술계 곳곳에 큼직한 족적을 남긴 이어령(1933~2022) 선생이 타계한 지 여섯 달이 지났다. 그런데도 고인의 신간 저서들이 여전히 잇달아 출간되며 대형 서점엔 ‘이어령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정도이다. 어느 시사 월간지는 선생의 인터뷰를 생전에 연재했는데 녹음 분량이 많아서인지 사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번 9월호에도 실렸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나올지 모르겠다.

    이어령 선생에 이어 20여 일 후에 불문학계의 거목 정명환(1929~2022) 교수가 별세했다. 대중적 지명도가 높지 않은 정 교수의 부음은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국 지성사 계보를 꿰뚫는 지식인이라면 정 교수의 학문적 내공이 얼마나 심오한지 알 것이리라. 그는 불문학을 바탕으로 문학, 예술 전반에 걸쳐 놀라운 통찰력을 보인 학자였고 고매한 인품과 탁월한 학식으로 후학들을 지도한 존경 받는 스승이었다.

    전통 깊은 문학 월간지 <문학사상>은 지난 4월호에 ‘이어령 추모특집’을, <현대문학>은 5월호에 ‘정명환 추모특집’을 실었다. 각각 쟁쟁한 여러 문사들이 고인을 기리는 애틋한 추모사를 썼다.

    필자는 고3 때인 1972년 10월 《문학사상》 창간호에 실린 이어령 주간의 창간사를 읽고 벅찬 가슴을 가눌 수 없었다.

    ‘상처진 자에게는 붕대와 같은 언어가 될 것이며, 폐를 앓고 있는 자에게는 신선한 초원의 바람 같은 언어가 될 것이며, 역사와 생을 배반하는 자들에겐 창끝 같은 도전의 언어, 불의 언어가 될 것이다. 종(種)의 언어가 될 것이다. 지루한 밤이 가고 새벽이 어떻게 오는지를 알려주는 종(鐘)의 언어가 될 것이다.’

    세월이 흘러 필자는 잠시 문학사상사 사장직을 맡은 적이 있는데 그때 이어령 주간이 매월 <문학사상>에 쓴 권두언을 다시 읽는 재미에 빠졌다. 시대정신을 적확하게 지적하는 주옥같은 명문들이었다.

    정명환 교수는 한국학자로서는 드물게 한국어, 불어, 영어, 일어로 논문을 작성하고 세계적인 학자들과 학술 토론을 벌인 석학이었다. 이런 반열에 든 한국인 학자는 철학자 박이문 교수, 재불 사회학자 정성배 교수 등 소수였다. 정명환 교수는 사르트르, 앙드레 지드에 정통했으며 명징한 산문으로도 필명을 떨쳤다.

    제자인 오생근 서울대 명예교수는 “선생님은 동료, 제자들과 식사할 때 발언을 독점하지 않고 품격 있는 유머를 구사하셨기에 참가자 모두가 내내 즐거웠다”고 회고했다.

    필자는 학부 시절에 불문과 학생도 아닌데 정 교수의 강의를 수강했다. 말씀을 기록하면 토씨 하나 고칠 필요 없는 깔끔한 문장이 될 정도로 명쾌했다. 명불허전의 명강의였다. 뜬금없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無)》에 대해 질문했는데 자상하게 설명해주셔서 감동했다.

    그 후 정 교수의 칼럼이 신문에 실리면 오려서 보관했고 저서가 나오면 사서 읽었다. 2021년 7월에 나온 《프루스트를 읽다》가 마지막 저서인데 서문에서 ‘명색이 불문학자인데 프루스트의 《잃었던 때를 찾아서》를 통독하지 않고도 읽은 체 행세했으니 뻔뻔했다’고 고백했다. 그 대작을 꼼꼼히 읽은 독서일지 형식이다. 이 책의 부제 ‘겸하여 나의 추억과 생각을 담아서’에 어울리게 저자의 삶과 사고가 녹아 있어 문학평론서라기보다 고품격 에세이집 같다.

    이어령, 정명환, 이 두 거목의 잔향(殘香)이 오래 남아 국격을 높여주기를 기원한다.


    고승철 언론인·저술가(전 동아일보 출판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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