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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우 칼럼] 세종이 훈민정음을 지은 본뜻과 법률가의 문장

    이한우 교장(논어등반학교)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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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 10년(1428년) 9월 27일 경상도 진주에서 김화(金禾)라는 자가 아버지를 죽이는 일이 벌어지자 보고를 받은 세종은 그 자리에서 “내가 임금답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자책했다.


    같은 해 10월 3일 경연에서 신하들을 불러 교화를 돈독하게 하는 방안을 토의하게 했다. 이에 변계량이‘효행록’ 등 서적을 반포해 일반 백성들도 널리 읽어 알게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세종은 “전에 편찬한 24인의 효행에다가 또 20여인의 효행을 더 넣고, 전조(前朝-고려)와 삼국시대(三國時代) 사람 중에서 효행이 특이(特異)한 자도 모두 수집하여 한 책을 편찬해 이루도록 하되, 집현전(集賢殿)에서 이를 주관하라”고 명했다.


    이렇게 해서 4년 후인 세종 14년(1432년) 6월 9일 집현전에서‘삼강행실’이라는 책을 편찬해 올린다. 얼마 후에는 그림을 덧붙여‘삼강행실도’를 발간한다.


    그러나 그림만으로 확산 속도에 한계가 있음을 파악한 세종은 그때부터 10년에 걸쳐 ‘언문(諺文)’ 창제에 들어간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 최만리 등과 논쟁이 일어나자 세종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해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떼를 지어 나올 것이다.”


    세종 10년 ‘김화 살부사건’충격
    법치가 아닌 덕치를 향한 결단
    여러 차례 우리말 순화작업 불구
    법률가 문장은 여전히 낯설기만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법치(法治)가 아닌 덕치(德治)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이었다.

     


    ‘세종실록’은 세종 25년(1443년) 12월 30일 언문 28자를 창제했음을 전하고 명칭을‘훈민정음’이라 했다고 밝히고 있다. 3년 후인 세종 28년(1446년) 9월 29일 공식적으로 창제를 선포했다. 같은 날 실록은 어제(御製)와 정인지 서문을 싣고 있다.


    그런데 어제에서 말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所欲言]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에 담긴 깊은 뜻을 우리는 간과해왔다. “말하고자 하는 바[所欲言]”란 단순한 표현 욕구를 말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정인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국과 언어가 달라 옥사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곡절(曲折)을 통하기가 어려워 괴로워했다.”


    비단 옥사를 다스리는 사람 뿐이겠는가? 소송 당사자들 또한 한문, 그 중에서도 법률 행정 전문 용어인 이문(吏文)으로 자신들의 억울함을 온전하게 표현하기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종이 말한 소욕언(所欲言)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세종은 백성 입장에서 말하고 있고 정인지는 옥사를 다스리는 관리 입장에서 말하고 있을 뿐 공통 주제는 바로 송사(訟事)이다.


    김화 사건부터 훈민정음 반포에 이르기까지 세종 생각을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김화 살부(殺父) 사건을 보고받는 순간 재위 10년을 맞고 있던 세종은 자신의 임금답지 못함[否德]이 이런 충격적 사건을 가져왔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법률 차원의 해법이 아니라 교화 차원의 해법을 모색했다. 그것이 삼강행실과 행실도 발간 사업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대부분 문맹인 상황에서 도서와 그림을 통한 교화 사업은 더딜 수밖에 없었고 이에 세종은 언문 창제를 결심한다.


    우리는 훈민정음 창제 후 세종과 최만리 논쟁에 대해서도 약간은 그릇된 정보를 갖고 있다. 당시 세종이 가장 분노했던 것은 최만리 등 관리들이 말한 단순한 언문 제작의 부당함이 아니라 정창손이 말한 내용이었다. 정창손은 “삼강행실 반포 후에도 충신 효자 열녀 무리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사람의 자질 여하 때문이지 어찌 언문으로 번역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달라지겠습니까?”라고 했다. 즉 양반과 일반 백성은 애당초 자질부터 다르다는 말이었다. 이는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해 민간에 반포하면 반드시 큰 효험이 있으리라 믿었던 세종 생각에 대한 정면 도발이었다. 그래서 논쟁이 끝나고 최만리 등은 의금부에 내렸다가 다 석방시켰지만 정창손만은 파직시키고 그런 말을 하게 된 연유를 국문하라고 했다.


    세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존 관리들이 쓰는 용어를 훈민정음으로 바꾸려는 첫 조처를 취한다. 세종 28년 12월 26일 세종은 이조에 뜻을 전해 “앞으로는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의 관리를 뽑을 때 훈민정음도 아울러 시험해 뽑도록 하라”고 명했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세종은 당시 육전(六典)을 비롯한 주요 법전들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했을 것이다.


    그러나 애민(愛民)과 위민(爲民)을 향한 세종의 발걸음은 아쉽게도 여기서 멈추었다. 그 후 훈민정음은 더 이상 백성 사랑을 위한 용처를 찾지 못한 채 불경 번역용 글자나 ‘암클’이 되었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 여러 차례 순화 작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률가들 문장은 일반 국민들에게는 낯설기 그지없다. 좀 더 국민 속으로 파고들기를 바란다.

     

     

    이한우 교장(논어등반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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