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은 재판 사건의 마침표이기도 해서, 판사는 판결을 마친 후 그 사건을 잊으려고 한다. 아니 잊어야만 한다. 일주일 단위로 돌아가는 재판부의 생활 주기상 그러하다. 그렇게 판결을 마친 사건은 과거의 일로 퇴장하고, 그 빈자리를 새로운 사건이 채워나가게 된다. 하지만, 한 달 정도 지났을까. 그렇게 작별한 것으로 생각했던 사건을 되돌아보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바로 상소장 접수. 복잡미묘한 심정이 드는 건 판사로서 어쩔 수 없나 보다. “그 정도로 결론을 낸 건 원고에게 최선일 텐데, 여전히 결론에 만족하지 못하고 상고를 한다니!”, “그때 피고가 채택해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던 증거조사를 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단념하고 항소를 안 했으려나?”, “과연 어떤 이유로 상고했을까?”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가지만, 상소이유는 추후 제출이라 대개 그 궁금증은 바로 풀리지 않는다.재판 당사자의 상소가 판사에게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잠시간이라도 해당 사건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됨은 분명하다. 판결은 조정과 달리 일도양단인 결론을 내는 일이라 양 당사자를 모두 만족시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울 것이다. 전부 승소로 상소의 이익이 없는 경우가 아닌 한 원심판결에 대한 상소가 전혀 제기되지 않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변론 종결까지 재판과정과 기록을 통해 드러난 모든 정보와 법 지식을 총동원하여 고심을 거듭한 끝에 선고 전날까지 밤잠 설쳐가며 판결하였음에도, 쌍방 상소로 귀결된다면 판사로서는 다소간 맥이 빠질 수 있다. 상소장을 보면서 판사에게 드는 복잡미묘한 심정과 교차하여 “최선을 다한 판결인데 왜 불복하는 것일까?”, “재판 과정 중 당사자가 원했던 증거신청을 채택하고, 하고 싶은 주장을 좀 더 펼칠 시간과 기회를 주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등 질문은 꼬리를 문다. 절차와 과정인 재판도, 그 최종결론인 판결도 판사와 원·피고, 소송대리인이 함께 만들어 낸 일종의 작품이다. 그 작품은 협업 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평단(국민이나 여론)에 의해 신랄한 비평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협업 당사자인 원·피고나 소송대리인에 의해 그 작품이 부정되거나 불만으로 가득한 비난을 받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당사자나 소송대리인이 재판 절차와 실체 결론에 대해 비판을 할 수밖에 없게 된 데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내재했던 것은 아닐까. 판사로서 “어림도 없다”, “되지도 않는다”라는 내심을 가지고 당사자의 주장에 애써 귀 기울이지 않거나 증거신청을 단칼에 거절한 것은 아닌지, 그로 인한 응어리나 절차적 불만이 불씨가 되어―비교적 명백한 법리에 따른 판결이고 심지어 다른 판사가 심리를 했더라도 결론이 달라지지 않았을 사건임에도―상소 제기로 이어진 것은 아닐지, 판사로서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때다.정문경 고법판사(서울고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