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법원 춘천재판부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민사사건이다. 지방자치단체가 설립한 법인이 민간업체와 공공성을 띤 내용의 계약을 맺었는바, 법인이 민간업체가 계약을 위반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계약을 해제하고 원상회복을 구하는 취지의 사건이었다. 1심은 민간업체가 계약을 위반한 것은 맞지만 여러 사정상 계약을 해제할 정도의 의무 위반은 아니라는 이유로 민간업체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새로이 항소심을 맡은 법인 측 대리인은 항소이유서부터 위 계약이 사법상 계약인지 공법상 계약인지에 관하여 상당 부분 할애하여 다투기 시작했고, 상대방 대리인 역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이에 관해 다투기 시작했다. 오히려 1심에서 주된 공방의 대상이었던 계약 위반 여부, 계약 위반이라면 계약을 해제할 정도인지에 관하여는 별다른 공방이 없었다. 공법상 계약과 사법상 계약의 준별이 얼마나 어려운지 구체적인 쟁점이 돼서 연구해본 실무가라면 알 수 있다(정말 어렵다). 당시 고생고생해서 변론 준비절차 진행을 준비했는데, 부장님께서 식사 자리에서 양측 대리인이 쓸데없이 힘을 쓴다고 지적하셨다. 강원도의 경우 별도의 행정법원이 없으므로 공법상 당사자 소송이나 민사소송 모두 일반법원에서 심리하므로 전속관할 위반 문제가 안 생기고, 심리절차 역시 사실상 동일하므로 1심 판결에 영향이 없어 무의미한 공방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내가 위 쟁점의 결론 도출이 쉽지 않다고 말씀드리자 부장님께서는 특유의 웃음과 함께 1심 판결의 당부에 영향이 없는 주장이므로 심도 있게 검토할 필요 없이 주장을 철회시키거나 안 되면 그 부분 논점은 간단히 작성하면 된다고 일러주셨다(실제 당시 부장님의 가르침은 후에 대법원 2018. 2. 13. 선고 2014두11328 판결로 그대로 나타났다). 덕분에 위 불필요한 쟁점에 쏟을 심판역량 대부분을 계약 위반 여부 및 그 정도에 집중하여 판결할 수 있었다. 사건을 심리하다 보면, 불필요한 주장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종종 보이는데, 상대방이 이에 대하여 열심히 반박 주장을 하게 되면 사건의 핵심과 다른 곳에서 열띤 공방이 벌어지는 경우가 있다. 더 나아가 이견이 있는 경위사실에 관하여 열정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민사재판은 기본적으로 당사자주의가 지배하고 있으므로 당사자들이 재판 결과에 영향이 없는 공방을 하더라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개입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경우가 많고 법원의 심판역량은 계속 소진된다. 만일 재판부가 재판 결과에 영향이 없는 논점의 당부까지 판단하게 되면 그 심리비용은 상상 이상으로 올라가게 되고 그 재판에 필요 충분한 심판역량을 쏟지 못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건에 쏟을 심판역량까지도 영향 받게 된다. 상대방의 주장이 비록 사실과 다르거나 틀리더라도 재판 결과에 사실상 영향이 없다면 재판부 입장에서 논의가 필요 없다는 식으로 피하는 것은 어떨지? 그렇게 하면 법원의 심판역량을 온전히 사건의 핵심 내용에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법원이나 검찰이 심판역량을 줄이는 쪽으로 결론 내는 경우도 있다. 형사항소심 배석판사를 할 때 사건이다. 당시 무자격 사무장 등이 변호사 명의를 빌려 개인파산 사건을 처리하면서 정액의 수임료(대체로 50만 원에서 100만 원 사이였다)를 받았다는 이유로 기소가 되었고, 1심에서 유죄판결 및 억대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같은 검사 또는 1심 재판부도 추징액의 산정과 관련해 수임료에서 부가가치세, 법원에 들어가는 인지대, 송달료 등 법정경비를 제외할 것인지 여부에 관해 사안별로 달리 판단했다. 대부분의 피고인이 장기간에 걸쳐 개인파산 사건 등을 처리하였으므로 변호사법 위반 횟수가 수백에서 수천 건에 달하였고, 법정경비 총액도 많게는 몇 억 원이었으므로 그 공제 여부는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물론 그 계산 역시 많은 노력이 필요한 고된 일이었다. 변호인 등이 서면 등을 통해 공제를 주장하면서 법정경비 계산을 명확하게 한 사례에서는 범죄수익금에서 법정경비를 공제했고(이유는 ‘수임료 계약 당시에 이미 다른 비용 명목으로 지급이 예정된 것으로 특정되고 그에 따라 지출되었다’는 취지였다), 단순히 공제 해달라고만 하면서 이를 명확히 특정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위 법정경비 역시 변호사법 위반 범죄의 수행을 위하여 지출한 비용에 지나지 않으므로 공제할 것이 아니다’라고 판단해 공제해주지 않았다[인터넷 신조어로 자강두천이 있다. 자강두천은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의 줄임말로 처음에는 서로의 수준이 비슷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상황을 의미했는데, 최근에는 ‘자존심만 강해 서로 이기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쓰는 모습’을 비꼬는 말로 쓰인다. 교행이 힘든 도로에서 서로에게 양보하지 않고 대치하여 뒤에 오는 차량들까지 뒤섞이면서 그 일대 교통을 마비시키는 자존심만 강한 사람들을 상상하면 된다. 목적지까지 가는 것은 까맣게 잊은 채로].권순건 부장판사 (창원지방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