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부는 10평 남짓 작은 임대아파트에서 자녀 둘을 키우며 살았다. 남자는 낮에는 택배 일을, 밤에는 아파트 세차 일을 했다. 잠잘 시간이 부족했지만 낮에 일하는 것만으로는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워 ‘투잡’을 뛰었다. 여자는 아이들 학교 가는 시간에 편의점 알바를 했다. 어느 날 편의점에 손님이 뜸해 애들이 잘 있는지 스마트폰 앱을 통해 집안을 보다 자는 딸 옆에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 남편을 발견했다.
그날 바로 남편을 집에서 쫓아냈다. 딸은 아빠가 만지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자는 척하고 있었다며, 아빠가 자기 때문에 집을 나가는 건 싫다고 울먹였다. 이 사건이 10대 딸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고민 끝에 아동보호단체에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했다. 남편을 형사 고소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아동학대 신고 의무가 있는 단체가 개입되자 일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다. 남자는 구속되었고, 중형을 면치 못할 처지가 되었다.
대부분의 성범죄 사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대립 구도를 이루지만, 부모가 가해자고 자녀가 피해자인 경우 그 관계는 어정쩡하다. 아빠가 이상한 행동을 해서 무섭고 두려운 날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 피해자에겐 가해자이기도 하지만, 피해자 아닌 남동생에겐 평범한 아빠였다. 무엇보다 아빠라는 존재 자체가 대체 불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아들은 눈에 띄게 위축되었다. 우울증이 심각한 것 같다며 학교 선생님이 치료 프로그램을 권했다. 여자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남편을 절대 용서할 수 없는데,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들은 아버지를 필요로 했다. 성범죄 사건이라 피해자 국선변호사가 있었지만, 피해자의 보호자는 가해자의 국선 변호인인 내게 연락해 왔다.
어릴적 학대 상처에 파묻히지 않고
옳고 그름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성숙함을 자녀들이 배워 성장하기를
“저흰 일찍 결혼했어요. 제가 가정폭력, 그리고 요즘 말로 하면 아동학대, 그런 거 피해서 고등학교 졸업하면서부터 집을 나와 살았거든요. 남편도 비슷한 사정이었어요. 저도 그 사람도 부모가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우리 자녀들한테 돈은 없어도 부모다운 부모가 되자고 했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겠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아빠를 너무 찾아요. 아이들한테서 아빠를 완전히 지울 수도 없을 거고요. 그래서 변론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여자는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아이들에 대한 걱정으로 뒤범벅된 혼란 속에서도 해야 할 일을 차분하고 지혜롭게 처리해냈다. 아동보호단체와 연결된 여성단체의 도움을 받아 이혼과 친권자 및 양육자 단독지정 절차를 밟았고, 긴급생계지원금을 신청해 받았다. 앞으로 한부모 지원을 받고 알바를 재개하면 어느 정도 생계를 해결할 수 있고, 아이들 공부는 각종 복지 혜택을 활용해서 할 거라고, 찾아보니 도움 주는 곳이 많고 복지 정책도 다양해 큰 걱정은 안 한다고 했다. 배운 게 많지 않고 가진 건 없지만, 본디 심지가 견고한 이 같았다. 남편의 부재가 초래할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우려로 옳고 그름의 기준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 직업에 종사하면서 한때의 피해자였던 가해자들을 종종 본다. 아동폭력에 노출되었던 이가 성인이 되어 자신에게도 권력을 생기면(그게 ‘부모’라는 지위일 뿐이더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로 변하곤 했다. 내 피고인도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릴 때 경험한 괴롭힘, 굴욕감과 수치심의 상처가 곪게 놔두지 않은 이도 있었다. 학대당한 경험에 파묻히지 않고 이를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능력으로 승화시킨 이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그 성숙함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피해자를 위하는 피해자의 보호자’를 위해 가해자를 변호하는 이상한(?) 변론을 하면서, 부디 그녀의 자녀들이 엄마를 본받으며 커 가길 기원했다. 몇 년 뒤 감옥을 출소하는 아빠를 다시 만나더라도,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은 아빠 대에서 완전히 끝내고, 그들의 엄마처럼 상처를 뛰어넘어 단단하게 성장해 가기를 말이다.
정혜진 (수원고법 국선전담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