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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혜진의 법과 사람사이

    [정혜진의 ‘법과 사람 사이’] 관찰은 ‘많이’, 판단은 ‘조금만’

    정혜진 변호사(경기중앙회)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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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란 관찰은 많이 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이라고 말했다. 어느 전직 법관이 그 말을 인용하면서 ‘사실을 인정하고 법을 적용하는 일’을 하는 법관도 소설가 못지않게 관찰하고 판단하는 일을 생업으로 하는 직업이라고 썼다(송민경, 《법관의 일》). 소설가가 가상의 등장인물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을 서술하고(관찰), 그 이야기 속에서 삶의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묻는(판단) 것과 비슷하게 판사는 소송 당사자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재판을 통해 밝히고(관찰), 드러난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법적 관점에서 누구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를 가린다(판단)는 것이다.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는 예술가의 일과 현실의 분쟁을 법의 잣대로 판단하는 직업 법관 일의 공통점을 발견한 그 통찰력에 감탄하며 생각해 보니 비단 법관뿐 아니라 구체와 추상을 오가는 법률가들은 대부분 관찰과 판단을 생업으로 삼는 직업인 듯싶다. 검사는 피의자와 피해자의 각 주장과 객관적 증거를 들여다보며(관찰) 기소 여부를 결정하고(판단) 하며, 변호사는 의뢰인의 주장과 희망 사항을 바탕으로 법적으로 유의미한 사실관계를 찾고(관찰), 의뢰인에게 유리한 법 논리를 구성(판단)한다.

    명사(관찰/판단)에서 더 나아가 부사(많이/조금만)에 강조점을 두면 어떨까. ‘관찰을 많이’ 해야 한다는 건 공통점임이 분명하다. 소설가가 관찰을 많이 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올바로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고, 법률가는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그래야 한다.

    오류의 근본은 관찰이 ‘적다’는 것
    법률가의 좋은 판단은
    일어난 일을 성실히 관찰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


    반면, ‘판단은 조금만’ 부분에서는 잠시 망설여졌다. 소설가가 판단을 조금만 해야 하는 이유는 최종 판단은 작가가 아닌 독자의 몫이기 때문인데, 이 점에서 소설가와 법률가의 길이 갈라지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법관은 판단을 다른 이에게 미룰 수 없다. 검사와 변호사는 소송에서는 최종 판단을 법관에게 구하지만, 그런 경우에조차 자신의 판단(공소사실/변론)은 가지고 있다. 법률가는 자신의 관찰을 바탕으로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소설가라고 해서 자신의 판단이 없는 건 아니지 않은가. 다만 소설의 재미를 위해 그 판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소설가가 판단을 ‘조금만’ 내려야 한다는 의미는 판단을 양적으로 적게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판단을 관찰처럼 노골적으로 많이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닐까.

    ‘판단은 조금만’ 부분을 굳이 이렇게까지 생각해 보는 이유는 관찰이 ‘적고’ 판단이 ‘많아’ 보이는 공소사실/변론/판결의 오류의 원인을 따져보기 위함이다. 몇 년 전부터 고등법원 항소심 사건만 하고 있는데, 항소심에서 사실오인으로 파기되는 1심 판결이 대부분 그랬다. 얼핏 보면 그럴듯한데, 더 많이 관찰하면 사실인정이 성기고, 판결도 판단이 겉돈 게 드러난다. 남의 변론이나 판결을 비판하는 의도는 아니라(1심은 특히 구속사건의 경우 시간적 제약 때문에 관찰을 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는 건 안다), 그 오류의 근본 원인은 관찰이 ‘적다’는 데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소설가가 좋은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은 결론을 준비하지 않고 이야기라는 아담한 광장 한가운데에 그저 정성껏 계속해서 가설을 쌓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가설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이야기라는 탈 것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단다(《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법률가가 좋은 판단을 내리는 기제도 비슷한 것 같다. 일어난 일을 성실히 관찰하다 보면 판단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관찰 전에 법부터 먼저 꺼내 사고하면 가설을 쌓아 올리기 전에 결론을 먼저 준비해 놓는 형편없는 소설 꼴이 된다. 관찰은 ‘많이’, 판단은 ‘조금만’(‘성급하지 않게’ 라고 해도 좋겠다) 내리는 전략은 법률가에게도 유효하다. 솜씨 좋은 소설가와 성실한 법률가는 본질이 통한다.


    정혜진 변호사(경기중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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