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코모 푸치니의 <라보엠>(1896)은 파리 뒷골목 예술가들의 가난한 삶과 사랑을 그린 오페라다. ‘보엠’이라는 말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보헤미안처럼 떠돌아다니는 가난한 예술가들’이란 뜻이다. 시인 로돌포는 화가 마르첼로, 음악가 쇼나르, 철학자 콜리네와 옥탑방에서 함께 지내는데, 추운 크리스마스이브에 아래층에 사는 미미와 첫 눈에 사랑에 빠져버린다. 친구들은 옥탑방을 비워주고 두 사람은 곧바로 살림을 차린다. 문제는 미미가 폐병으로 죽어가는 중이고 로돌포는 치료비를 대기엔 너무 가난하다는 점이다. 결국 둘은 헤어지지만 최후의 순간에 미미가 옥탑방을 찾아와 연인과 친구들 앞에서 숨을 거둔다.

원작은 프랑스 작가 앙리 뮈르제의 《보헤미안의 삶의 정경》(1851)이다. 23편의 짧은 이야기가 묶인 소설인데 주인공은 로돌포 한 사람이 아니라 파리 뒷골목의 여러 예술가들이다. 가난한 청년들이 겪는 고단하지만 생기 넘치는 삶, 다양한 연애담, 그리고 각자 나름의 성공을 거둔다는 후일담으로 구성된다. 오페라는 원작과 다른 점이 많다. 보헤미안 중 로돌포가 단연 중요하게 다루어진 점도 그렇지만 소설 속에서 로돌포는 미미뿐 아니라 루이즈, 로르, 앙젤, 줄리엣이란 여러 아가씨와 차례로 사귄다. 미미 한사람을 사랑한 순애보는 아닌 것이다. 더욱이 로돌포와 미미가 처음 만나는 장면은 프랑신과 자크라는 다른 커플의 이야기를 가져왔고 계절도 크리스마스가 아닌 봄이다. 여하간 로돌포와 미미의 사랑을 끝내 아름답게 포장한 점은 우리 누구라도 경험했을 아무리 슬퍼도 아름다웠던 옛사랑과 일맥상통한다.
21세기 유럽의 주요 오페라하우스에서 연출의 주류를 차지한 트렌드는 원래 대본의 시대와 장소는 물론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주어진 상황까지도 거의 완전히 재해석하는 ‘레지테아터’(작년 8월 11일자 <루카> 편 참조)다. 하지만 <라보엠>에는 그런 시도가 많지 않은 편이다. 베리즈모(이탈리아 리얼리즘) 오페라가 성행하던 시기에 나온 대표작의 하나로 간주되기에 작품이 만들어질 당시 분위기를 살리는 것이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2년 1월, 노르웨이 국립오페라가 자국의 스타 연출가 스테판 헤르하임 연출로 아주 도전적인 <라보엠>을 선보였다. 막이 오르면 눈에 들어오는 상황이 충격적이다. 현대적 의학장비를 갖춘 병원에서 항암 치료로 머리가 다 빠져버린 채 죽어가는 미미의 곁을 로돌포가 지키는 가운데 생명표시 신호가 끊어지면 음악이 시작되는 것이다. 로돌포는 연인의 죽음이라는 현실의 비극을 마주하면서 둘 사이의 아름다웠던 지난날을 회상한다. 위급한 미미 앞에 달려왔던 병원 스태프들은 마르첼로와 무제타를 비롯한 로돌포의 친구들로 모습을 바꾼다. 가난하고 슬펐지만 한없이 그립기만 한 로돌포의 추억과 갑자기 찾아온 죽음이라는 현실이 대비되면서 오페라의 비극성은 최고조로 달아오른다.
이 실황은 2012년 가을에 ‘엘렉트릭 픽처’라는 오스트레일리아 레이블로 발매되었는데, 당시에는 너무 생경한 분위기와 최고의 수준에는 조금 못 미치는 출연진의 노래 탓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공연이 작년에 ‘낙소스 레이블’로 재발매되는 것을 보고 무슨 일일까 싶어 다시 감상하다가 큰 울림을 마주했다. 이처럼 연출을 통해 전에 느끼지 못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페라 예술의 큰 장점이다. 다시 보니 디에고 토레(로돌포), 마리타 솔베리(미미), 바실리 라류크(마르첼로), 제니퍼 라울리(무제타) 등 출연진도 연출 의도에 어울리는 연기를 소화해낸 괜찮은 가수들이요, 오페라의 연극적 완성도가 높아지면 가창력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음을 재확인했다. 역시 오페라는 노래묶음일 뿐만 아니라 한 편의 연극이기도 하다.
유형종 음악&무용칼럼니스트·무지크바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