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한 일제강점기에 여러 민족지도자들이 나라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승만 박사와 상해임시정부를 이끈 김구 선생이 대표적인 인물이다.거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위세에 짓눌린 대다수 국민들이 독립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체념했을 때 선구자들은 자주를 위한 줄기찬 대일(對日) 항쟁을 벌였다. 이승만, 김구와는 달리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중심인물 가운데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1890~1945) 선생이 있다. 교육자,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사상가로서의 통찰력을 보인 고하는 혁혁한 업적을 세웠는데도 대중적으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5월 8일 오후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서 고하의 탄신 133주년 및 서거 78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필자는 말석에 앉아 고하를 추모했다. 김은미 이화여대 총장은 고하의 생애를 봉독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890년 전남 담양 출생 △네 살 때부터 의병대장 기삼연 선생에게서 한학 수학 △1906년 백양사 청류암(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전봉준이 은둔하며 마지막 밤을 보낸 곳)에서 김병로, 김성수, 백관수, 장덕수 등과 함께 을사늑약 체결에 대해 비분강개하며 구국 방안을 논의 △와세다대학 수학, 메이지대학 졸업 △유학생 잡지 <학지광(學之光)> 창간 △중앙학교 교장 때 숙직실에서 3·1독립운동 준비, 거사 후 1년 반 동안 수감 △동아일보 사장 △1925년 하와이 제1회 범태평양민족회의에 김활란·서재필·신흥우 등과 참석하고 이승만의 망명 제의를 거절 △이순신 장군 현창사업 주도 △해방 후 한국민주당 당수 △1945년 12월 30일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피격 서거추모강연에서 윤평중 한신대 명예교수는 “고하가 1925년에 쓴 글을 보면 일본과 미국의 충돌,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을 예견하는 통찰력을 보였다”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워야 함을 강조한 선각자요 실천적 이상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 윤 교수는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는 단수가 아니고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송진우, 여운형, 조봉암 등 복수”라면서 “고하는 독립과 건국에 기여한 공적으로 보아 제1열에 모셔야 할 분인데 그동안 다소 홀대 받았다”고 지적했다.소프라노 서혜연 서울대 성악과 교수는 ‘고하 송진우 선생 추모의 노래’(이은상 시, 장일남 곡) 등 추모의 노래 3곡을 불러 행사의 격조를 높였다. 고하의 장손인 송상현 서울대 명예교수 내외분은 참석자에게 일일이 인사하며 고마움을 나타냈다.고건 전 총리는 『고건 회고록』에서 고하와 선친인 고형곤 전 전북대 총장의 일화를 담았다. 선친은 경성제대 졸업반일 때 마지막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애를 태웠다. 어느 지인이 고하를 찾아가 변통을 부탁하라고 귀띔했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관대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했다. 고하는 고형곤의 사정을 듣고 누런 봉투에 등록금을 넣어 건네주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으로 보답하면 되니 굳이 갚지 않아도 되네!”라 말했단다. 졸업 후 인사차 찾아가니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해보라며 춘원 이광수 편집국장에게 소개했다.고하의 일대기 『독립을 향한 집념』에는 1945년 12월 말 신탁통치 찬반 대립으로 정국이 혼란할 때가 묘사됐다. 삐라, 성명서, 시위, 테러가 난무하고 요인 암살설이 나돌았다. ‘송진우 타도!’라는 괴벽보가 나붙자 미군정 당국에서는 경호 헌병을 보내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고하는 “한국 사람으로서나를 해칠 사람은 없을 터이니 안심하라고 하지 장군에게 말씀드리라”고 사양했다. 결국 고하는 흉탄에 쓰러졌다.추모식이 끝나고 언덕길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 서혜연 소프라노의 노래가 오랫동안 귀에 맴돌았다.조국 되찾은 지 여든 해 / 고하 가신 지 여든 해 / 이 땅엔 비바람조차 어이 그리 많은 겁니까 / 갈수록 흐린 세상이기에 갈수록 어둡기만 하기에 / 그 지조 아쉬워서 그 경륜 아쉬워서 /여기 동지들 한데 모여 옛모습 그리옵니다 / 이 나라 바로 서는 길 이 겨레 편히 사는 길 / 행여 가르치심 받을까 하고 굳이 가르치심 받고 싶어서고승철 언론인·저술가(전 동아일보 출판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