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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관혁이 쓰는 인문학 속의 법

    [임관혁이 쓰는 인문학 속의 법] 대한제국 최초의 검사 이준, 대한민국 최초의 대법원장 김병로

    임관혁 검사장 (서울동부지방검찰청)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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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ite.jpg헤이그 특사 이준
    1907년 6월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 헤이그, 외교권을 박탈당한 조선 황제 고종이 비밀리에 보낸 특사 3명이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이들은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의분을 참지 못한 이준은 불귀의 객이 되었고(사인에는 여러 설이 있다), 이상설은 간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며, 이위종은 러시아로 돌아갔다.

    일제는 이 사건을 문제 삼아 고종을 퇴위시켰고, 통감부는 궐석재판에서 이상설에게 사형을,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징역형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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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국평화회의보(1907년 7월 5일 1면)의 헤이그 특사들. 왼쪽이 이준, 중앙이 이상설, 오른쪽이 이위종


    헤이그 특사로 유명하지만 대한제국 최초의 검사로서, 강직하고 엄정한 일 처리로 백성들로부터 ‘호법신(護法神)’이라는 칭송을 받은 이준.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으로서 “집권자가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뜻인 것처럼 조작하는 행위를 막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임을 주장하고 행동으로 보여준 김병로. 법률가로서 양심과 정의를 지키며 초지일관 살아간 점에서 두 사람은 성공한 인생을 살았고 오늘날 지식인·법률가들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검사 이준
    이준(李儁, 1859~1907)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한제국의 검사보로 1개월여 일했고, 정식 검사로서 강직하고 기개 있는 삶을 살았다.

    그는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1894년에 과거의 초시에 합격해 함흥의 순릉참봉에 임명됐지만 곧 사직하고 한양으로 올라왔다. 이듬해 갑오개혁으로 신설된 법관양성소에 들어가 제1회로 수료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준은 조정 관료들의 불법과 비행을 파헤치다가 밉보여 불과 1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이후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1897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이듬해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다시 독립협회 일을 하다가 ‘왕정 전복을 꾀한다’는 무고를 당하여 간부 17명과 함께 체포되고 수개월 후 석방되었다.

    1899년 고종의 명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비밀결사인 대한보안회 등에서 활동하고, 친일대신 5명을 성토하다가 체포, 유배된 후 이듬해 석방되었다. 이후에도 대한자강회, 국민교육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이준은 1906년 6월 최고사법기관인 평리원 소속 검사로 임용되어 올바른 태도와 엄정한 일 처리로 백성들로부터는 ‘호법신(護法神)’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는 권세가인 풍양 조씨와 남양 홍씨 사이에 벌어진 묘지 분쟁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고종의 신임을 얻었다. 이어 황족인 이재규가 문서를 위조하여 다른 사람의 전답을 빼앗은 사건에 대하여 엄정하게 징역 10년을 구형하였는데, 고종이 유배형으로 감형하였다.

    같은 해 10월 고종이 황태자(순종)의 재혼을 맞이해 은사령을 내리는데, 법부(현 법무부)에서 작성한 명단을 내려보내자, 이준은 ‘은사 명단 작성은 검사의 고유권한’이라며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가 체포된 애국지사들을 은사 명단의 첫머리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법부는 이준이 작성한 은사안을 무시한 채 고종에게 보고하였다.

    1907년 2월 이준이 이에 반발하여 법부 형사국장을 직권남용 등으로 고소하자, 법부는 평리원에 지시하여 ‘하관이 상관을 고소한 죄’로 이준을 체포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져 많은 군중이 평리원에 몰려와 이준의 석방을 요구하자, 3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후 법무 문서과장, 평리원 검사 등을 추가로 고소했다. 이준은 다시 구속되어 재판에서 태형 100대를 선고받았는데, 고종이 70대로 감해 주었다. 다행히 벌금으로 대신하여 장을 맞은 것 같지는 않다.

    이준은 다시 평리원 검사로 출근하여 평리원 재판장 이윤용(이완용의 형)과 법부대신 이하영의 면직을 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며 끈질기게 저항하였으나, 곧 파면되고 말았다. 검사로서 1년 남짓이지만 참으로 불굴의 강렬한 삶이었다.

    이후 고종은 이준의 기개를 높이 샀음인지 헤이그 특사로 보냈던 것이다. 다음은 이준이 특사로 가는 각오를 담은 글이다.

    “헤이그 밀사로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택하게 되면
    어느 누가 청산에 와서 술잔 부어놓고 울어주려나.
    가을바람 쓸쓸한데 물조차 차구나.

    대장부 한번 가면 어찌 다시 돌아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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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헤이그의 이준 평화박물관

     


    민족변호사 김병로
    김병로(金炳魯, 1887~1964)는 전라북도 순창 출신으로, 호가 가인(街人)인데, ‘나라를 잃고 쓸쓸히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이란 뜻이다.

    최익현이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18세의 김병로는 이에 가담하여 순창의 일본인 관청을 습격했다. 이후 창평의 창흥의숙에 들어가 김성수, 송진우 등과 교유하고, 1910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는데 경술국치 소식에 바로 귀국했다. 1911년 다시 도쿄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법과 3학년에 편입하여 1913년에 졸업하고, 더 공부하다가 1915년 귀국했다. 1919년 판사가 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는 의열단원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제2차 의열단 사건,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 수양동우회 사건, 암태도 소작쟁의 등에 연루된 독립운동가 등을 열심히 변호했다. 1923년에는 변호사 권승렬(초대 검찰총장), 이인(초대 법무부장관), 허헌(해방 후 월북) 등과 함께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설립하여, 애국지사 무료변론, 가족 돌봄 등의 활동에 전념했다.

    1923년에는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고, 1927년 신간회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이로 인하여 1931년에는 6개월 동안 변호사 정직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1934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1945년 패망이 임박한 일제가 애국지사들을 살해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자 가평군으로 피신했다.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해방 후 미군정청의 사법부장, 헌법기초위원회 위원 등을 지내고, 1948년 8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에 지명되어 국회의 인준을 받았다. 대법원장 김병로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내세우며 사사건건 이승만 대통령에게 맞섰다. 이승만 대통령은 법무부장관에게 “요즘 헌법 잘 계시나? 왜 대법원에 헌법 한 분 계시지 않나?”라며 김병로 원장을 비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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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법원장 김병로

     

    갈등의 시작은 친일파 청산 문제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을 우선시하며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이었고, 반민족행위자 처벌법을 고쳐 공소시효를 단축하려고 했다. 김병로 원장이 반대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로 하여금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습격하도록 하여 조직을 사실상 와해시켰다. 이에 김병로 원장은 “이번 사건은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불법행위에 대해 사법기관에 판단을 요구해 온다면 법에 비춰 추호도 용서 없이 판단하겠다.”고 일갈했다.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의 직선제 개헌을 위한 ‘부산 정치파동’ 직후, 김병로 원장은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하였다.

    1950년 3월 김병로 체제의 법원은 ‘국회 프락치 사건’에서 남로당의 프락치(첩자)로 지목된 국회의원 13명에 대해 징역 3~10년의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내렸다. 1952년에는 야당 소속으로 ‘거창양민학살사건’의 국회조사단장으로 활동하며 정부에 눈엣가시가 된 서민호 의원이 전라도 순천에서 자신을 미행하던 육군 대위를 사살하여 구속 기소된 사건에서, 제1심법원이 정당방위를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1954년에는 안호상 전 문교부장관이 총선과정에서 한 발언을 문제 삼아 국보법위반으로 기소한 사건에 대하여 무죄 선고가 있었다. 이렇듯 이승만 대통령의 정적들을 대상으로 한 사건들에서 선고된 형량이 기대에 못 미치거나 무죄 선고가 잇따르자 이 대통령의 불만이 쌓여갔다.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 연설을 통해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며 사법부를 정면 공격하자 김병로 대법원장은 가볍게 받아쳤다. “판결에 이의가 있으면 항소하십시오.”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된 김병로는 1957년 12월 정년퇴임한 후, 독재 정치를 비판하며 한동안 정치인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김병로가 남긴 말이다.

    “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
    “법관은 최후까지 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


    지식인·법률가의 사표
    지식인으로서, 법률가로서 양심과 정의를 지키며 초지일관 살아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준이나 김병로는 그런 점에서 성공한 인생을 살았고 오늘날 지식인·법률가들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임관혁 검사장 (서울동부지방검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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