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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초포럼] 법정이율 유감

    천경훈 교수(서울대 로스쿨)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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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말이 있다. 초나라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중에 들고 있던 칼이 물에 빠지자, 뱃전에 표시를 하고는 “여기가 내 칼이 빠진 곳”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출전인 <여씨춘추>에서는 세상이 변하는 데도 옛 제도를 고수하는 어리석음을 꾸짖는 취지로 이 고사를 인용하고 있다.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실제로 있을까 싶겠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집단적으로 비슷한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예가 없지 않다.


    한 예로 법정이율을 들 수 있다. 법정이율은 당사자들이 별도로 정한 이율이 없을 때에 적용되는 이율로서 주로 지연손해금을 산정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 민사 법정이율 5%, 상사 법정이율 6%는 민법(1958년 제정, 1960년 시행) 및 상법(1962년 제정, 1963년 시행) 제정 시 정해졌다. 그 후 시중금리는 엄청난 변동을 겪었다. 한국은행 통계자료에 의하면 시중은행의 평균 예금금리는 1965~1967년 26%까지 올라갔고, 1970년대에는 20% 내외, 1980년대에는 10% 내외를 오르내렸다. 2010년대 들어 급격히 낮아지기 시작해서 최근 몇 년은 1% 대에 머물렀으나 2022년에는 3%를 넘었다.

    이처럼 금리 변동이 엄청난데도 법정이율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시장금리가 법정이율보다 훨씬 높던 과거 수십 년 동안 채권자는 법정이율에 따라 터무니없는 과소배상을 받았고, 시장금리가 법정이율 아래로 떨어진 오늘날은 오히려 법정이율에 따라 과다배상을 받고 있는 것이다. 자유당 때 정해진 법정이율을 시대 상황과 무관하게 고수하여 상식과 정의에 어긋나는 결과를 낳고 있고, 이는 사법제도에 대한 조롱과 불신으로 이어진다.

    정도는 덜하지만 비슷한 예는 그 외에도 있다. 상법은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인 상장회사를 대규모상장회사라고 정의하고 감사위원회 의무화 등 강화된 특칙을 적용한다. 반면 자본금 10억원 미만인 회사는 감사기구를 두지 않아도 되는 등 완화된 특칙의 적용을 받는다. 경제가 성장하고 화폐가치가 하락하면서 이런 기준금액들의 의미는 당초와 크게 달라졌지만(20년 전의 2조원과 지금의 2조원이 갖는 의미는 매우 다르다), 한번 정해진 기준들은 변함없이 남아 있다. 배가 지금 어디 있건 예전에 표시한 칼자국을 고집하는 형국이다.

    다른 선진국들은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법정이율 변동제를 운영한다. EU 지침은 지연손해금에 적용되는 법정이율을 반기마다 기준금리에 따라 조정하도록 한다. 일본도 매월 기준금리를 고시하고 그에 따라 3년마다 법정이율을 조정한다(상사이율에 관한 특칙도 없앴다). 국내에도 관련 연구들이 나와 있고 2014년 법무부 민법개정안을 비롯한 법안들도 나와 있다. 그러나 입법부든 사법부든 이 문제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따른 대규모기업집단의 기준에 대해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는데, 2020년 개정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을 ‘자산총액이 국내총생산액의 0.5%에 해당하는 금액 이상인 기업집단’으로 정의했다(제31조 제1항). GDP의 변동에 자연스럽게 연동되도록 한 것이다. 당시 개정에 관여한 필자도 이 방안을 지지했는데 법률로 다른 지표를 지시하는 선례가 없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잘 운영되어 다른 법에도 참고가 되면 좋겠다. 각주구검의 어리석음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천경훈 교수(서울대 로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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