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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령용어 순화'의 문제점

    윤남근 고려대 법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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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제처는 2000년경부터 법률의 한글화 작업을 주도해 왔다. 그리고 2003년 8월과 2004년 12월 ‘법률한글화를 위한 특별조치법안’을 정부입법으로 제출하였으나 국회의 회기 만료로 자동 폐기되었다. 위 법안은 비록 폐기되기는 하였으나, 우리나라 법률에 한자로 표기된 용어를 한글로 변경하고, 한글로 표기함으로써 의미해석상 혼란이 초래될 수 있는 용어는 한글과 한자를 병기한다는 내용으로서 이러한 조치는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그러나 한글화 작업과 병행하여 추진되고 있는 이른바 ‘법령용어 순화’ 작업은 이로 인하여 법률 자체가 변경·훼손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법제처가 제시하고 있는 법령용어 순화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즉 어려운 한자어와 용어, 일본식 표현, 이해하기 어려운 외래어나 외국어, 지나치게 줄여 쓴 법령문은 쉬운 이해를 가로막는 것이므로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보통 수준의 국민이면 누구든지 잘 이해할 수 있게 까다롭지 않고 쉬운 법령문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렵다는 것의 기준은 법률 전문가의 관점이 아닌, 법령의 수요자인 일반 국민의 눈높이가 돼야 한다고 한다.

    위 정책목표는 언뜻 보면 그럴 듯하지만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말에는 우리 고유의 것도 있으나 한자어가 대부분이고 외래어도 상당히 많다. 한자어든 외래어든, 혹은 그 단어의 유래가 역사적으로 일본이든 중국이든 또는 기타 제3국이든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말이 되었다면 이제 완전한 우리말이다. 엄연한 우리말임에도 그 족보를 따져 특정 단어나 표현을 법의 세계에서 추방하겠다는 발상은 참으로 무모하고도 오만해 보인다. 더구나 정부가 나서서 이러한 작업을 하는 것은 국민의 언어생활에 관한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또한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보통 수준의 국민’이라는 것은 의무교육의 대상인 중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학력을 가진 사람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법령의 용어를 쉬운 것으로 바꿈으로써 중졸자 정도면 모든 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법령용어를 쉽게 풀어쓰면 기본교육을 받은 모든 국민이 법전만 읽고도 그 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거나, 혹은 법령용어가 어렵기 때문에 법이 어렵다고 한다면 이는 법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이다.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전체주의 국가에서의 법은 당이나 통치자의 통치이념이나 국민의 행동준칙을 문서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는 법학이 전문성을 가질 필요도 없고 법률전문가로서의 변호사 제도도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형식적 존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국가에서의 법은 통치자나 그 집단의 명령에 불과하므로 法文은 기본적 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반면에 자유민주주의 세계의 법은 그 자체로 방대할 뿐 아니라 고도의 전문성을 띠고 있다. 법이 전문분야를 규율하는 과정에서 전문화되는 측면도 있고, 법의 일반이론 자체가 법학이라는 학문의 틀 속에서 전문화되는 측면도 있다. 의학·자연과학이나 다른 사회과학 분야와 마찬가지로 법에 있어서도 전문용어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고, 이러한 법률용어(legal jargon)는 법의 세계에 있어서 의사소통의 신속·정확성과 시대를 초월하는 법의 연속성을 보장해 준다. 굳이 전문적 법률용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법률가들 사이에 통용되는 정형적인 표현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용어나 표현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단순한 사전적 의미 외에 복잡한 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법령상의 용어들을 비법률가인 일반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어 모두 바꾸겠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법의 왜곡과 훼손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최근 정비된 법률들을 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우리말인데도 그 근원이 한자어라는 이유로 무리하게 순수 우리말로 바꾸는 바람에 법규정의 의미가 왜곡되거나 그 해석이 혼란스러워진 것이 적지 않다.

    2002년 정비된 민사소송법에 나타난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보자(괄호 안은 개정 전의 용어임).

    제53조 ①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진 여러 사람이 제52조의 규정에 해당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이들은 그 가운데에서 모두를 위하여 당사자가 될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을 선정하거나 이를 바꿀 수 있다. ← (다수자, 그 중에서 총원을 위하여, 1인 또는 수인, 변경할)

    제54조 제53조의 규정에 따라 선정된 여러 당사자 가운데 죽거나 그 자격을 잃은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다른 당사자가 모두를 위하여 소송행위를 한다. ← (수인의 당사자 중 사망하거나 그 자격을 상실한 자, 총원)

    제235조 당사자가 소송능력을 잃은 때 또는 법정대리인이 죽거나 대리권을 잃은 때에 소송절차는 중단된다. ← (상실한, 사망하거나)

    제344조 ①다음 각호의 경우에 문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제출을 거부하지 못한다.

    1. 당사자가 소송에서 인용한 문서를 가지고 있는 때

    2. 신청자가 문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넘겨 달라고 하거나 보겠다고 요구할 수 있는 사법상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 때 ← (소지하고, 인도나 열람을)

    위의 예들은, 내용은 그대로 둔 채 오직 ‘법령용어의 순화’를 위하여 개정한 법조문들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부분에 한하여 보더라도 가액, 다수자, 1인 또는 수인, 변경, 자격상실, 총원, 권리의 신장이나 방어, 저촉, 무익, 변론의 전취지, 낭독, 열람, 사망, 소지, 인도 등의 용어들이 왜 법에서 사라져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정도의 용어가 어려운 한자어이거나 일본식 표현이어서 법에 대한 쉬운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말인가? 위의 용어들을 제거하고 나서 민사소송법이 아무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워졌는가?

    그 뿐이 아니다. 법령용어를 순수 우리말로 바꾸어 놓은 것을 보면 오류투성이다. 위의 예 중 ‘1인 또는 수인’에서 수인(數人)은 2인 이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개정법에서 수인을 대신하여 나타난 용어는 ‘여러 사람’ 혹은 ‘여럿’이다. 그러나 여럿은 2~3명 정도의 사람을 포섭하지는 못하므로, 수인이 곧 여럿이 될 수는 없다. 사망도 마찬가지다. 사망은 사람이 죽는 것을 의미하고, 짐승이나 식물이 죽었을 경우에는 사망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또한 ‘죽다’라는 말은 생명이 다하는 것 외에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도 사용된다. 그렇게 때문에 법의 세계에 있어서 ‘사망’이라는 용어와 ‘죽다’라는 용어는 서로 호환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가진다’라는 표현은 ‘소지한다’라는 의미 외에 ‘소유한다’는 의미도 있다. 소지와 소유는 법적으로 전혀 다른 개념이다. ‘넘기다’라는 말 역시 단순한 점유의 이전만을 의미할 수도 있고 소유권의 양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열람하다’ 또한 ‘보다’와는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보다’는 단순히 시선이 와 닿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법에 있어서 ‘열람하다’는 단지 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서류의 내용까지 인식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법치국가에 있어서 법의 존재 의의는 기본적으로 분쟁의 해결에 있다. 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분쟁이 예방되는 측면도 있다. 법이 이러한 본래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그 法文은 해석상 혼란의 여지가 없는 정확·명료한 것이어야 한다. 굳이 난해한 용어를 사용할 것은 아니나 쉬운 말보다 정확성을 우선시해야 한다. 그리고 일반인의 일상용어라도 그것이 법의 세계에서 특별한 법적 의미를 갖는 용어로 통용되는 경우에는 이미 법률용어화된 것이므로 이를 함부로 다른 용어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개정법을 보면, 모든 단어를 순수 우리말로 대체해 보겠다는 오직 하나의 목표달성을 위하여 기존의 법이 광범위하게 훼손되고 혼란스러워졌다고 할 수밖에 없다.

    법의 지배(rule of law)의 정도는 그 나라 자유민주주의 발전의 척도가 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법은 입법자가 만들지만 일단 입법자의 손을 떠난 법은 독자적 생명력을 가지고 만인을 지배한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고,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 법은 사회에서 이러한 지위를 누리는 것에 걸맞게 그 용어나 어법이 완벽해야 함은 물론 그 표현도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하여 ‘죽다’, ‘바꾸다’, ‘지키다’, ‘넘기다’ 등의 말이 품위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사망, 변경, 방어, 인도 등 이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단어까지 한자어라는 이유로 기존의 법에서 모조리 삭제되고 ‘죽는다’, ‘바꾼다’, ‘지킨다’, ‘넘겨 달라’ 등의 용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보니 개정법은 아무래도 유치(幼稚)해 보인다. 또한 해석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법조문에 대하여 오직 그 法文을 순수국어로 바꾸기 위하여 이를 개정한다는 것 자체가 법에 대한 경시이기도 하다.

    이미 이런 식으로 정비되었거나 향후 정비될 법률이 800개쯤 된다고 한다. 정부는 ‘법령용어 순화’ 작업을 중단하기 바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은 원상회복하거나 다시 고쳐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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