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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인을 위한 특별한 보호 - 유럽인권재판소

    김성진 헌법연구관 <유럽인권재판소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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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들어가며

    수형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할 것인가의 문제는 보편적 인권의 문제인가, 민주적 선택의 문제인가? 한 국가의 이러한 선택에 대한 외부적 간섭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이는 지금 유럽인권재판소(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와 이의 모기관(mother institution)인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가 위치한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서 뜨겁게 펼쳐지고 있는 논쟁의 주제이며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지역인권기구로 평가 받고 있는 유럽인권재판소의 향후 개혁의 방향을 가늠케 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유럽인권재판소 건물 앞에 선 김성진 헌법연구관.

    2. Hirst 사건

    2005년 10월 6일 유럽인권재판소는 대재판부(Grand Chamber, 17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최종 재판부) 재판관 12:5의 판단으로 수형자의 국회의원선거 및 지방선거에서의 투표를 금지하고 있는 영국의 선거법이 자유로운 선거권을 규정하고 있는 유럽인권협약에 위반된다고 판단하였다. 유럽인권재판소는 민주주의에서 선거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것이 개별국가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로 구현될 것인가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해당 국가의 역사, 문화, 정치적 상황 등을 고려하여 회원국 스스로가 정할 수 있는 재량의 영역(margin of appreciation)에 속하는 부분이나, 선거권의 제한에 있어서는 그러한 제한이 정당한 입법목적(legitimate aim)과 비례성(proportionate)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유죄로 확정된 범죄의 성격과 선거권 제한과의 상관관계, 범죄의 심각성과 형량, 개별적 상황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전면적이고 일률적으로 수형자의 선거권을 제한하는 것은 유럽인권협약에 위반된다고 판단하였다.

    이 판결 후 영국 정부는 2006년 4월 유럽인권재판소 판결의 집행기구인 각료회의(Committee of Ministers, 회원국 외무부장관으로 구성)에 해당 법률의 개정 등, Hirst 판결의 이행 계획(action plan)을 제출하였으나 이는 실제로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유럽인권재판소는 동일한 쟁점이 문제가 된 사건에서 이례적으로 영국 정부의 Hirst 판결 집행의 미준수를 지적하며 준수 시한을 명시한다. 2010년 11월 23일 선고된 Greens and M.T. 사건에서 유럽인권재판소는 수형자의 투표권을 일률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영국의 선거법에 대해 다시 한 번 유럽인권협약 위반임을 밝히며 그 위반의 원인이 Hirst 판결의 미집행에서 기인함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특히 Hirst 판결의 미집행이 장기화 되고 있음을 이유로 영국 정부에게 Greens and M.T. 판결이 확정된 후 6개월 내(Greens and M.T. 판결이 2011년 4월 11일 확정되었으므로 준수시한은 2011년 10월 11일)에 기존의 선거법을 유럽인권협약에 위반되지 않도록 개정한 법률안을 제출토록 명령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동일한 쟁점을 이유로 영국을 상대로 제기된 2,500 여건의 사건의 심리를 중지시켰다.

    영국 정부는 동일한 쟁점으로 이탈리아의 선거법이 문제된 Scoppola 사건에 제3자로 개입(third party intervention)하면서 Greens and M.T. 사건의 준수 시한을 Scoppola 사건 종결 이후로 연장해 줄 것을 신청하였고, 유럽인권재판소는 이 신청을 받아들여 Scoppola 사건 선고 후 6개월 내에 개정 법률안을 제출토록 준수 시한을 연장하였다. Scoppola 사건은 2011년 11월 2일 공개변론이 열렸으며 현재 심리 중이다.

    3. 영국의 대응

    2005년 Hirst 판결 이후 영국 정부는 국민 정서를 이유로 수형자의 투표권을 인정하는 법률의 개정에 소극적이었다. 특히 오랜 의회절대주의(Parliamentary Sovereignty)의 전통을 가진 영국 의회에게 있어 사법부, 더구나 국제재판소에 의한 의회 결정에 대한 개입은 익숙지 않았다. 또한 수형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할 것인가의 문제는 개별 국가가 자국의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민주적 의사 결정에 따라 결정할 사안으로 유럽인권재판소가 이러한 사안에 개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여기에는 1998년 유럽인권협약의 국내 이행을 위해 도입된 인권법(Human Rights Act)과 2009년 상원에서 독립한 대법원에 의해 영국 법원이 인권을 이유로 점차 적극적으로 의회의 결정에 개입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감도 그 배경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영국의 사법부도 외국 법원의 개입에 대해 우호적이지 아니하였다. 몇 몇 전 현직 고위법관을 중심으로 유럽인권재판소의 국내 문제 개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러한 때에 영국이 유럽평의회의 의제를 주도해 나갈 수 있는 의장국에 취임한다. 2011년 11월 7일 순번제로 돌아가는 유럽평의회의 의장국이 된 영국은 의장국 취임과 동시에 자신들이 추구할 최우선 과제로 유럽인권재판소의 개혁을 천명한다. 유럽인권재판소 개혁의 문제는 사건 수의 급증(현재 약 15만 건의 사건이 계류 중)에 따라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문제로 동유럽 국가들이 대거 회원국으로 합류한 90년대 중후반 이후 유럽인권재판소를 상설재판소화 시키고 사건의 효과적인 처리를 위해 여러 절차적 개혁을 진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사건 수의 급증은 다른 한편으론 유럽인권재판소에 대한 유럽인들의 기대와 신뢰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매년 약 6만 건씩 유럽 각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심판청구(이 중 약 4만 건 정도가 처리됨)는 국내적 절차를 통해 보호받지 못한 개인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보호 수단이자 제2차 세계 대전의 참혹한 인권침해의 반성적 결과로 출발한 유럽의 지역인권시스템에서 회원국을 감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즉, 시민 스스로 하여금 자국 정부의 인권침해에 대한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영국이 유럽평의회의 의장국으로서 강조하고 있는 유럽인권재판소의 개혁 방향은 보조성의 원칙(the rule of subsidiarity)의 강화이다. 즉, 유럽인권협약의 이행에 있어 주된 책임은 회원국 스스로에게 있으며 유럽인권재판소는 단지 회원국이 유럽인권협약을 준수하는 데 있어 이를 도와주는 보조적 역할(subsidiary role)에 충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해 각국이 유럽인권협약을 이행하는데 있어 가지는 재량을 넓게 봄으로써 유럽인권재판소의 개입을 최소화 하고 이에 따라 유럽인권재판소의 사건 수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유럽인권협약의 이행에 있어 각국의 재량을 인정해 주는 방법으로 유럽인권재판소 판결이 있다하더라도 집행기구인 각료회의에서 이의 집행을 거부할 수 있는 절차를 도입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다.

    영국이 의장국으로서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유럽인권재판소의 개혁이 어떻게 진행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영국의 의장국으로서의 임기는 올해 5월 14일 끝난다.

    4. 맺음말

    얼마 전 이곳에서 친하게 지내는 러시아 연구관과 점심을 같이 하였다. 수형자 투표권에 대한 사건에 대해 얘기를 하던 중, 자신들은 지금 더 힘든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한다. 수형자 투표권과 관련하여 러시아를 상대로 청구된 Gladkov 사건이 있는데, 이것은 러시아 선거법이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 헌법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러시아 헌법 제32조는 명시적으로 수형자의 투표권을 금지하고 있는데 기존의 유럽인권재판소의 판례에 따른다면 이는 유럽인권협약 위반임을 면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여기서 새로운 고민이 시작 된다. 한 국가 국민의 총체적 의지인 헌법이 국제재판소에 의해 협약 위반으로 판단되고 나아가 배상책임까지 물게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은 그리 낯선 질문만은 아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이미 여러 차례 각국의 헌법 조문에 대해서도 협약 위반으로 판단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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