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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연방대법원의 정체성과 사법심사구조

    김진한 헌법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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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서론

    미국 연방대법원은 수 세기에 걸친 역사 속에서 그 역할을 스스로 변화시켜 왔다. 오늘날 미국 연방대법원이 어떠한 정체성을 갖는가에 관한 문제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전제가 된다.

    20세기 초반 오늘날 연방대법원의 현대적 기틀을 이룩한 William Howard Taft 대법원장은 연방대법원의 역할은 '항소심 법원의 판결이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 헌법 문제 또는 그 밖에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판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William H. Rhenquist 전 대법원장도 연방대법원은 '하급심의 잘못을 교정하는 일반적인 상고심 법원'이 아니라 '헌법의 해석과 연방법에 관한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특별한 법원'이라고 평가하였다.

    네덜란드의 비교헌법학자 Tim Koopmans 교수는 오늘날 미국 연방대법원은 헌법적 쟁점에 관한 재판에 집중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헌법재판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미국 연방대법원은 대법원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반적인 상고사건을 다루는 보통의 대법원과 달리 주로 헌법적 쟁점 등 중요한 법적 쟁점에 대하여만 판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실체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사법기관이다.

    필자는 헌법재판소와 미국 연방대법원의 합의로 마련된 프로그램에 따라 2010년 10월부터 2011년 4월까지 워싱턴 D.C. 소재 연방사법센터(FJC)에서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법심사를 연구하였다. 과연 미국 연방대법원은 어떠한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그와 같은 실체를 어떤 방법으로 형성하고 있는가를 그 재판업무 단계별 과정을 살펴보는 방법으로 소개하기로 한다.

    2.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

    가.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 권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독특한 정체성은 실질적으로는 엄격한 법적 쟁점의 선별을 내용으로 하는 상고허가제도(writ of certiorari)를 통하여 스스로 판단주제를 선정할 수 있는 권한에 기초한다. 연방대법원은 스스로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적절한 법적 쟁점을 선택하고, 그와 같은 사건에 역량을 집중하여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극히 일부의 연방대법원의 원심관할 사건을 제외하고는 연방대법원에 대한 사법심사의 거의 모든 사건이 certiorari 관할 사건으로 되었다. 그리하여 연방대법원의 사법심사를 받고자 하는 당사자는 연방대법원에 대하여 사법심사를 요구하는 신청(petition)을 하고, 그에 대한 허가를 받아야 한다.

    신청에 대한 허가 여부는 사법적으로 통제받지 아니하는 재량권이다. 그리하여, 2009-2010년 회기 동안 연방대법원에서 처리한 사건의 통계를 보면, 총 8,085건의 사건 가운데 연방대법원이 선별하여 정식의 판결을 하였던 건수가 77건에 불과하다(약식처리 91건).

    나.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 기준

    허가를 부여하는 법적 기준에 관한 법률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연방대법원은 종래 선례의 기준을 종합하여 '중요성'이라는 기준을 규칙에 정하고 있다. 중요성의 판단요소로는 쟁점의 특성, 하급법원의 판단오류의 정도 등 다양한 요소가 고려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해당 법적 쟁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판단이다. 연방대법원이 선별하는 사건 가운데 헌법적 쟁점이 사건이 많은 이유도 헌법적 쟁점의 영향력이 가장 중대하기 때문이다.

    다. 연방대법원의 사건선별의 평의방식

    연방대법원은 지정재판부 또는 소부를 두고 있지 않으며 모든 평의는 전원재판부에서 행하고 있다. certiorari 신청 사건에 대한 평의 역시 전원재판부에서 행한다. 그리하여 그 허가 여부의 판단을 전원재판부의 평의에서 4명 이상의 대법관이 찬성할 경우 신청을 받아들여 사법심사를 허가하는 전통을 형성하였다. 이를 일반적으로 4표의 법칙(Rule of Four)이라고 부른다.

    라. 사건을 선택하지 아니하는 결정과 그에 대한 반대의견

    신청에 대한 거절 결정은 한 문장의 결론으로 내려지며 이유는 기재되지 아니한다. 거절결정의 결정적 기준은 '중요성'이라고 하는 매우 추상적인 기준이므로 같은 거절결정이라고 하여도 그 의미는 다양하다. 심지어, 하나의 거절결정이라고 하여도 대법관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즉, 해당 소송은 부적법한 소송이다, 법적 쟁점이 중요하지 아니하다, 해당 쟁점에 관하여 하급심 법원들의 판단이 충분하지 않다는 등 그 의미가 다양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의 통일된 이유를 기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법관이 certiorari 신청 기각결정에 대하여 강한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반대의견을 발표한다. 그 내용은 주로 사건이 연방대법원이 판단할 만큼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논박하는 내용이다. 이 경우에는 이유기재 없는 한 줄의 결정문에 반대의견이 첨부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다.

    3. 연방대법원의 구두변론

    가. 연방대법원의 구두변론의 구체적인 방식

    구두변론은 연방대법원 심판절차를 이해하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연방대법원은 정식으로 판결할 사건에 대하여는 모두 구두변론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연방대법원은 1년의 회기 동안 약 60-80건의 사건에 대하여 정식판결을 하고 있으므로 한 회기 동안 동일한 숫자의 구두변론을 진행하게 된다.

    한 사건에 대한 변론시간은 1시간이며 이 시간을 매우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각 당사자의 대리인은 30분 이내에 변론을 마쳐야 한다. 구두변론절차에서 대리인은 자신의 사건에 대한 주장을 발표하는 동시에 대법관들의 질문에 응답을 해야 한다. 30분이라는 제약된 시간 내에 자신의 주장의 요지를 효과적으로 설명하여야 할 뿐 아니라 대법관들의 질문에도 성공적으로 답변해야 한다.

    대법관들의 질문태도는 매우 공격적이어서, 대리인이 자신의 주장을 발언하는 중 질문할 뿐 아니라, 대리인이 다른 대법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끊고 질문하기도 한다. 대리인들도 논점에 관한 비판적인 지적에 대하여는 최대한 반론을 편다.

    나. 연방대법원 구두변론의 실질적 기능

    구두변론 과정은 연방대법관들의 사건의 결론에 대한 의견을 형성하는 기능을 한다. 연방대법관들은 강연, 회고록 등을 통하여 구두변론 절차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강조하고 있다. Rehnquist 전 대법원장은 그 회고록에서 '적지 않은 수의 사건의 경우 변론을 통하여 입장을 바꾸었으며, 그와 같은 변경은 특히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사건에서 자주 발생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연방대법관들은 변론과정에서 대리인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통하여 동료 대법관들과 간접적으로 사건에 관하여 토론을 한다. 대법관들은 동료가 제기하는 질문과 발언을 통하여 동료 대법관들이 어떠한 의견을 갖고 있는 것인지 추측하며, 대리인에 대한 자신의 질문을 통하여 다른 대법관의 의견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또한 변론절차는 연방대법관들의 부족한 사건 연구를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변론절차에서 대법관들의 입장은 파악하지 못하였던 부분을 설명해 달라는 입장이고, 대리인들은 자신의 관점을 설명하면서도 대법관들이 사건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도움을 제공하는 입장이다.

    4. 본안에 관한 평의 및 토론의 진행

    연방대법원의 사건 평의는 재판장인 연방대법원장이 사건을 소개하고 자신의 결론을 밝히면서 개시된다. 발언의 순서는 우리 헌법재판소 또는 대법원의 평의에서 이루어지는 발언순서와 반대이다. 즉, 연방대법원장으로 시작하여 경력이 높은 대법관으로부터 낮은 대법관의 순서로 발언이 이루어진다. 또한 한 번 발언한 대법관은 모든 대법관들이 발언을 마치기 전에는 두 번째 발언을 하지 못하는 불문율을 가지고 있다.

    평의가 끝난 후 평의 결론의 대강의 윤곽은 잡히지만,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의견의 방향이 어떻게 결정될 것인지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평의에서 세부적인 쟁점에 관한 의견이 조정이 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대법관들 상호간에 교환되는 메모로 논의가 이루어진다. 특히, 판결문의 내용 수정과 관련한 메모는 메모의 수신자 뿐 아니라 다른 대법관 모두에게도 참조의 형태로 전달한다. 그리하여 연방대법관들은 서면으로 개별 대법관과 의사교환을 하면서도 전체 대법관 모두와 토의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으며, 사건에 관한 연방대법원의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든 대법관들이 동시에 파악할 수 있다.

    5. 판결문(opinions) 작성

    우리의 제도와 달리 미국 연방대법원에는 사건에 대한 주심 대법관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연방대법관들은 모든 사건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다.

    주심 제도가 없으므로 판결문 작성과정은 판결문을 작성할 대법관을 정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의견을 작성하는 대법관을 정하는 관행에 따르면 연방대법원장은 다수의견 작성 대법관 가운데 한명을 법정의견 작성자로 임명할 수 있다. 연방대법원장이 반대의견에 동참하여 법정의견에 속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경력이 가장 오래 된 선임 대법관이 법정의견 작성 대법관을 선정할 권한이 있다. 반대의견 및 별개의견 작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방식을 운영하고 있다.

    법정의견의 작성의 책임을 맡은 대법관은 다른 대법관들이 의견에 동참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초고를 만든 후 초고를 재판부 전원에게 회람한다. 법정의견 초안 작성 대법관이 초안을 대법관들에게 회람하면, 다른 대법관들은 의견에 동참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여 집필 대법관에게 통보한다.

    만일 대법관이 다른 제안이나 의견이 없이 법정의견에 찬성한다면 '나를 다수의견에 포함시켜 주십시오(Please, join me).'라고 메모를 보낸다. 하지만 일부의 의견에 수정을 원하는 경우에는 해당 판결문 초안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집필 대법관은 다양한 의견 가운데 자신이 양보하고 타협할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받아들여 그 의견을 반영한다.

    6. 결어

    미국 연방대법원의 사법심사 구조의 특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고 하면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연방대법원은 가령 모든 사건의 전원재판부 평의, 모든 정식사건에 대한 변론회부 등 스스로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원칙은 완고할 정도로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있다. 그 반면, 매우 실용적인 사고를 하여 중요하지 아니한 부분에 관하여는 과감하게 포기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마련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리하여 연방대법원이 판단할 만한 중요한 가치가 없다고 보는 사건은 선별 과정에서 과감하게 판단을 포기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와 같은 심사구조를 통하여 중대한 법적 쟁점을 선정하고, 그에 관하여 여론과 선입관·법해석의 관행에 대한 의심에 기초한 진지한 숙고를 거쳐 결론을 도출하고자 한다. 연방대법원의 심사구조는 다양한 관점 간의 직접적 대화를 통하여 가장 타당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확신에 기초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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