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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미술 이야기

    (29) 한석봉의 '석봉서' 3첩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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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3대 서예가 하면 보통 안평대군 이용(1418~1453), 석봉 한호(1543~1605), 추사 김정희(1786~1856)를 말한다.

    누가 처음 이 말을 했는지는 모르나 조선시대에서 초기, 중기, 후기에 한 사람씩 제대로 평가한 것 같다. 또 시대마다 그 당대에 알맞은 글씨가 나오게 마련인데 이 세 사람은 그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글씨를 썼다. 안평은 조선 초기 왕권의 틀을 잡는 시기에 남들이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송설체를 써서 힘이 넘치고 우아하면서도 절도 있는 위엄을 보여줬다면, 한석봉은 조선의 기틀을 완성하고 내외적으로 복잡다난한 시기에 사자관(寫字官)으로서 외교문서를 비롯해 행정적인 글씨에 적합한 왕희지 계통의 둥글둥글하면서도 반듯한 요즈음의 인쇄체와 비슷한 글씨를 잘 써서 당시 국왕인 선조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또 추사는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학술뿐만 아니라 글씨의 다양성과 변화의 무궁함으로 서예계의 삼차원을 만든 사람이다.



    그런데 안평대군은 물론이고 석봉과 추사가 조선 3대 서예가로 불리게 된 이유는 타고난 재질에도 있겠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공부와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석봉은 안평 같은 왕자나 추사 같이 대단한 양반가 출신도 아닌 중인집안의 평범한 사람으로 피나는 노력을 통해 글씨 하나로 집안을 일으킨 그야말로 입지전적 인물이다. 일개 중인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이나 인품이 당시 제일인 인물들과 교유할 수 있었으니 유사 이래로 글씨 하나로 이렇게 대우를 받은 사람은 석봉을 제외하고 다시는 없을 것이다.

    석봉은 출신이 낮기 때문에 그의 글씨 품격도 높지 못하다는 평을 하기도 하나 글씨란 출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다만 그의 직업이 사자관이었으므로 그의 과업이 정서(正書)와 소자(小字)를 일상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글씨도 사무적이며 규격화된 글씨를 주로 생산해낼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감상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에도 그의 직업적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소해(小楷)는 워낙 많이 썼기 때문에 그야말로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중국의 학자 주지번(朱之蕃: 1546-1624)이 "석봉의 글씨는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과 서로 갑을을 다툴 것이다."고 한 것은 결코 예의적인 칭찬이라고만 할 수 없다.

    석봉의 서예사상(書藝史上) 위치는 실로 한 시기를 대표하는 우뚝한 존재이며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석봉의 글씨에 대하여는 글씨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아는 사람이 적다. 그것은 현재까지 석봉의 글씨가 천자문이나 몇몇 탁본첩 외에는 별로 간행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석봉이 시도 잘하고 전하는 서간(書簡)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문장도 매우 훌륭하였으나 그러한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의 사후에 문집(文集)이 간행되지 않은 것에도 연관성이 있다.

    여기에 나온 '석봉서'천지인(天地人) 3첩(사진)은 지금까지 발견된 석봉의 여러 글씨 첩 중에서 가장 뛰어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석봉의 글씨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총 24종 106장으로 되어있으며 아주 작은 해서부터 주먹만 한 크기의 초서에 이르기까지 해서, 행서, 행초서, 초서 등 각체가 각기 다른 크기로 써 있다. 이 세 첩의 글씨를 보면 그동안 우리가 잘알지 못했던 석봉의 진면목을 재발견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자료가 진즉에 나왔더라면 석봉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으리라 여겨진다. 또 이 첩에는 당대 최고의 시인 소리를 듣던 오산 차천로(五山 車天輅)가 석봉에게 준 장편의 글(贈石峯, 七言排律四十韻)이 들어있는데 이 글만 봐도 당시 석봉의 위치가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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