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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자하의 雅顔使君壽詩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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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동을 거래하다 보면 문득문득 오래된 물건에는 귀신이 붙어 있다고 하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실감이 날 때가 있다. 이'아안사군수시(雅顔使君壽詩)'(사진) 편액 글씨는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7)가 후배(後輩)인 기원 민노행(杞園 閔魯行: 1777~1845?)의 회갑에 써준 축수(祝壽)의 시다. 자하와 이 댁과는 예부터 세교(世交)가 있어 민노행의 부친과는 잘 아는 사이라는 사실이 자하의 시집인 '경수당전고(警修堂詩藁)'에 실려 있는 여러 편의 글에서 알 수 있다. 아안(雅顔)은 민노행의 자요, 사군(使君)은 군수를 지칭하는 단어다. 그러니 민노행이 화순(和順)고을을 맡아 다스릴 때에 자하가 보낸 글임을 알 수 있고, 회갑에 조그만 고을의 원님을 겨우 한 민노행의 벼슬은 별로 높지 않았음을 또 알 수 있다.



    필자는 한때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에 후서(後敍)를 붙인 민노행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여 여러 문헌을 뒤진 일이 있었다. 그 과정에 매우 흥미 있는 여러 자료가 나왔다. 그 중의 하나가 추사의 말년 제자 중 개화에 앞장서 후진에게 큰 영향을 준 고환당 강위(: 1820~1884)의 초기 스승이 민노행임을 알았다. 강위가 추사를 찾아 제주까지 가서 공부한 것은 오로지 스승 민노행의 가르침에 따른 것임을 알았다.

    민노행은 큰 벼슬은 하지 못했지만 당대 서울에서는 꽤 명망 있는 학자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당시는 이단으로 몰려 조금이라도 행세하는 양반가에서는 거의 기피하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처음 고환당이 민노행을 스승으로 모시려 할 때 가장 친했던 친구인 용산 정건조(蓉山 鄭健朝: 1823~1882)가 극구 말렸던 것도 모두 이런 사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민노행의 인물에 관한 사항은 별로 알려진 게 없다. 그의 문집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가 편찬한 백과사전적인 류서(類書) 명수지문(名數咫聞)이나 지문별집(咫聞別集)을 보거나, '실사구시설후서'를 보면 추사만큼이나 청나라 고증학(考證學)에 깊은 조예가 있었고 아울러 당색은 달라도 추사와도 깊은 교유를 가졌던 것 같다. 민노행이 교유한 사람 즉 자하(紫霞)나 정건조 같은 사람들과 매우 친한 것을 보면 소론 쪽의 사람이 분명하다. 추사는 노론 쪽 사람이나 남인 쪽의 다산 정약용, 정학연(丁學淵) 부자나 초의(草衣)스님 등과 학문을 토론하였으니 민노행과의 만남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자하의 '경수당전고'에는 제목이 약간 다르게 나와 있다. '수민화순아안회갑시(壽閔和順雅顔回甲詩)'로 되어 있고 약간의 주(註)가 붙어 있으며, 오언율시(五言律詩) 2수(首)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 현액에는 3수가 실려 있다. 문집에 왜 한 편의 시가 빠져있는지는 알 수 없다. 첫 수는 어머님이 손수 지어준 옷을 입고 자녀들과의 즐거운 회갑잔치 모습을, 둘째 수는 이 집안에서 7대만에 처음 있게 된 회갑잔치에의 축하, 셋째 수는 주인공인 민노행이 화순군수로 있으면서 송사가 적고 풍년에다가 청렴하여 모든 고을사람이 좋아한다는 내용이다.

    추사와 민노행 그리고 강위 이 세 사람의 사제지간, 당색과 나이를 초월해 추사와 종유하던 자하가 글과 시로 민노행의 회갑을 축하하는 이 현액 작품, 이 작품이 내게 온 것이 귀신이 붙지 않았다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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