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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관예우 소견

    정인진 변호사 (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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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젠가 딸아이가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다. "아빠, 사람들이 '네 아빠는 변호사 노릇 하면서 전관예우를 받아 돈 많이 벌겠지'라고 빈정대는데 그런 대우를 받는 게 사실인가요?" "글쎄다, 너도 알다시피 돈은 별로 못 벌었다마는."

    언어는 소통의 도구라고 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식으로 말하자면 언어는 행위와 분리되지 않는다.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행위 하는 것이다. 언어의 주술적 기능을 신봉한 원시인도 이미 이것을 알았다. 그렇다. 말이란 한 번 만들어 내면 그 자체의 행위력을 가진다. 말의 내용에 따라 그 행위력은 때로 폐해로 나타난다. 공자의 정명론이 말하는 이치도 이쯤에 있다.

    어느 군부대에 나이 든 하사관이 있었는데, 어쩌다 영어 단어를 하나 배우면 기어코 그 말을 쓰고 싶어서 안달을 했다나. 하루는 창문이 영어로 '윈도우'라는 것을 알게 되고는, 창문 있는 곳을 지나다가 병사들이 눈에 띄면 아무나 붙잡고는 저 윈도우 좀 닦으라고 하도 닦달을 해대서 다들 한동안 고생을 했다고 한다. 꼭 못 배운 사람이라서 그랬던 것도 아닐 듯 싶다. 이미 17세에 '원추곡선론'이라는 수학 논문을 쓴 파스칼 같은 천재도 그 고상한 저작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책을 저술하는 것도 결국은 잘난 체를 하고 싶어서라고. 말이란 만들어 내면 쓰고 싶고 어느 쪽으로 쓰든 그걸로 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일 게다. 판결의 공정성과 관련하여 변호사 선임 문제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다들 눈을 부라리며 하는 말이 전관예우다. 법조인이 아니면 여기에 언필칭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을 덧붙이기 일쑤고, 요즘엔 그것도 모자라 조잡한 신조어까지 만들어 낸다. 전관예우의 실체가 있느냐 없느냐 따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때로 민망한 일이다. 십여 년 전 법철학을 연구하는 어느 학회에서 법조윤리에 관한 발표를 하느라고 불려나갔다가 전관예우가 존재하는 것 아니냐고 참석자들마다 공격에 가까운 질문을 하는데, 그런 거 아니라는 답을 되풀이하다가 나중엔 지칠 정도가 되었다. 판사와 전관 변호사 사이에는 으레 무슨 시커먼 거래가 있는 것쯤으로 아는 이들에게 알아들을 만한 설명을 하기가 난감했던 것이다. 오늘날 전관이 아닌 변호사는 나만 손해 보는듯하니 억울해서 열을 올리고, 전관인 변호사는 예우는커녕 이른바 '전관 학대'를 받는다며 속이 상한다. 판사는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변명해도 언론이나 국회는 물론 이제 일반인들마저 알아듣는 시늉을 하지 않으니 무언가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그런데 딱하게도 이에 관해서는 수긍할 만한 아무런 실증적 연구도 없다. 기껏해야 설문조사 정도이고 그저 떠돌아다니는 말뿐이다.

    어쩔 것인가. 무릇 법조인이라면 우선 전관예우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전에 조심해야 한다. 다소간 사위스럽다는 듯 취급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공의를 위해서 할 말은 물론 있다. 그리고 공의를 위해서 해야 할 일도 있을 게다. 그러나 조상님들이 남기신 말씀대로 말이 씨가 되는 법이다. 전관예우라는 말에 함몰되는 순간, 사람들은 그 말이 가져올 수 있는 여러 폐해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일간신문의 칼럼에 나온 예대로 전관 변호사를 선임하는 피고인은 자기 죄를 반성하지 않는 것이니 형을 가중하자고 말할 일은 아니다. 전관 변호사가 선임되었다고 해서 혹시 봐주었다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기록을 한 번 더 볼 일도 물론 아니다.

    말이 나온 김에 더 하자면, 그 무겁다는 재판을 하는 자리에서도 "정의는 결국 반쪽짜리다"라는 격언이 주는 함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나마 그 반쪽마저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면 어쩔 것인가. 판사노릇 하던 시절, 기분 나쁜 이야기가 들리기에 나이 든 선배 판사에게 호소하자, 그가 이런 말을 해 주는 것이었다. 네가 어느 형사사건에서 재판하면서 돈을 받았다는 헛소문이 돌 때 가장 경계할 것은 그 소문이 거짓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기준을 어겨가며 피고인을 엄벌하는 일이라고. 법관의 금도란 그런 것이다. 그만한 여유가 없이는 그만한 자리에 있기 어렵다. 사법철학이 저잣거리의 철학과 달라야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다. 판관은 정도를 가며 사법작용이 가져야 할 법적 안정성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좀 억울하더라도 제 길을 가면 그만이다. 미안한 심정으로 하는 말이지만, 판사가 아무리 억울해도 피고인이 억울해지는 것과는 유가 다르다.

    불문엔 이런 화두가 있다. 선사 운문에게 학인(學人)이 물었다. "생각이 많으면 어떻습니까?" "죄가 많으니라." "그럼 아예 일념(一念)도 일으키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죄가 수미산(須彌山)이니라. 섬찟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딱하다. 우리 사법엔 운문 같은 스승이 없는 것일까. 항심을 지키는 모습을 보고 싶다. 너무들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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