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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 법조산책

    3. 효도 계약서와 미국의 신탁제도

    박영선 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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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도 계약서가 한국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대했다. 재산을 받고 나서 변심해 버린 자녀들에게 지친 베이비부머세대의 재미있는 발상인 것 같기도 하고, 물질 만능주의 속에서 점차 변해가는 가족관계를 반영하는 풍속도 같아 씁쓸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불효자 때문에 이미 한 증여를 번복하기 위한 법정케이스가 그다지 많지 않다. 불효자는 어디에나 있겠지만, 한국의 베이비부머와는 달리 미국의 시니어들은 죽을 때까지 경제적 독립성을 지키려고 한다. 나이가 들거나 치매 등으로 몸과 마음이 노쇠하게 되면, 자녀에게 기대기보다 요양원에서 친구들과 말년을 보내는 것을 선호한다. 물론, 돈 보따리는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다.

    효도 계약서 대신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자녀를 길들이기 위해 트러스트, 즉 신탁 제도를 많이 이용해 왔다. 흔히 신탁을 통해 부모로 부터 재산을 받은 사람을 '트러스트 베이비'라고 한다. 미국에도 한국처럼 재산의 명의를 자녀이름으로 넘겨버리는 상속성 증여도 있지만, 자녀를 위한 신탁의 형태로 재산을 증여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부동산을 증여하되 부동산 등기에 자녀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과 신탁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종류의 신탁은 보편적으로 쓰이는 증여 및 상속 방법이다.

    신탁제도는 재산권을 3D입체로 나눈다. 재산을 증여하는 사람인 위탁자,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인 신탁관리자, 재산을 쓰는 사람인 수혜자로 분리한다. 수혜자도 현재 수혜자와 현재수혜자가 사망할시 나중 수혜자로 나눌 수 있다. 신탁에 들어간 재산은 신탁 관리자가 관리하는데, 재산의 위탁자인 부모는 신탁관리인이 될 수 없다.

    신탁을 이용해 재산을 증여하는 가장 큰 장점은 바로 효도계약서처럼 이런 저런 조건을 달수 있다는 것이다. 일 년에 몇 번씩 보러 와라, 시부모에게 말대꾸해선 안 된다 등 재치 넘친 효도 계약서의 조항들을 적을 수도 있겠지만, 미국에서 신탁이 가장 많이 쓰이는 경우는 자녀가 마약이나 도박 등의 문제를 가진 경우다. 자녀가 약물검사를 통과한 해에만 재산을 분배 하라던가, 도박장 근처에 얼씬거린다면 그해엔 아무런 재산분배가 없을 것이라는 등 위탁자인 부모가 관리자인 트러스티에게 신탁을 작성 시 자세한 분배가이드라인을 정해준다.

    많은 유대인 부호들은 신탁을 인센티브제로 이용하기도 한다. 자식이 부모의 재산에 기대 빈둥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버지가 나온 대학을 가게 되면 대학 재학기간동안 얼마간의 재산을 보너스로 준다든지, 졸업 후 매년 땀 흘려 번 돈에 상응하는 금액을 보너스로 준다든지 이른바 '당근'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신탁은 재산을 무분별하게 자녀에게 넘긴 후 뒷북치는 것이 아니라, "재산을 받기 위해선 이렇게 해라"는 미래지향적인 서류다. 만일 자녀가 행동강령에 따를 수 없다면, 신탁의 재산은 신탁에 정해진 나중수혜자가 재산을 받을 수도 있다. 나중수혜자의 예로는 자녀대신 손자, 손녀, 친인척, 비영리 단체 등을 들 수 있다.


    과거 위탁자가 내세우는 조건 중 법적 문제를 야기한 것들이 있다. 신탁은 계약서의 일종이기 때문에 미국 헌법에서 보호하는 권리와 충돌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다른 인종하고는 결혼할 수 없다 라든가, 매주 교회에 가야한다는 결혼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을 침범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다. 또 "이 빌딩은 절대 팔아서는 안 되고, 김 씨 집안 대대로 가지고 있어라"며 부동산을 사고파는데 영속적인 제약을 두는 것은 과거 부동산법에 의해 부적절하다고 판단되었다.

    효도 계약서도 시간이 지나 진화하게 되면, 위와 같은 미국의 신탁제도의 예처럼 부모가 내세운 조건에 대한 해석이나 집행상의 이유로 가족 간의 법정소송을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신탁을 이용할 때는, 신탁의 재산이 수혜자인 자녀에게 분배될 때가 아니라, 재산이 위탁자의 손을 떠나 신탁에 들어가는 순간, 증여가 발생했다고 본다. 신탁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위탁자가 아닌 신탁관리자가 재산을 관리하게 되므로 위탁자의 소유권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 세금법 측면으로 본다면, 효도 계약서에 의해 부모가 재산을 주었다 뺏을 수 있다면 그게 무슨 증여인가 싶다. 증여란 증여자가 증여하는 재산에 대해 모든 권리를 포기 하는 것이고, 만일 증여자가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온전한 증여라 보기 힘들다. 미국에서는 서류상으로 증여를 하고 실제 소유권이 바뀌지 않았을 경우, 사망 시 상속 세금폭탄을 맞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부동산의 명의를 자녀에게 넘겼는데, 실제로는 부모가 부동산도 다 관리하고 임대금액을 다 받아썼다고 하면 증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증여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판명되면, 이미 문서상 증여한 빌딩이 상속세를 내야하는 재산으로 취급된다.

    효도 계약서에 의해 증여된 재산이 부모에게 다시 갈수 있어도, 이미 낸 증여세는 어떻게 처리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다. 증여세 환급신청을 하게 되면, 가족싸움에 정부도 끼게 되는 셈이니 이미 낸 증여세를 다시 돌려주었다가, 부모가 사망하면 증여했다 다시 받은 재산에 상속세를 매기는 등 행정상 복잡한 수순을 받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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