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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조광장

    법률가의 열린 사고(思考)

    - 판례를 상수항으로 보는 생각에 대한 비판 -

    남형두 원장 (연세대 로스쿨)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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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1

    의례적인 자리에서 처음 만난 어떤 변호사(화자)가 좋아하는 선배 변호사(A) 이야기를 했다. 마침 A는 필자의 대학 동기였는데 화자는 필자와 A의 관계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화자에 따르면 사건 해결을 위해 판례를 열심히 뒤지고 있던 자신에게 2년 위인 A 변호사가 "뭘 그렇게 판례만 들여다보고 있어요?"라고 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다 알 수 있는데 왜 판례만 찾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변호사가 된 지 고작 3년 정도 된 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오래 기억에 남을 만했을 것이다. 물론 당시 정황상 화자는 A를 비판하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필자 또한 A라면 능히 그럴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했기에 A를 위한 변론은 필요하지 않아 가벼운 미소로 화답하고 말았다.

    장면 #2

    공부하다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면 책을 찾아보듯 전화부터 해보는 대상인, 필자의 또다른 대학 친구(B)가 있다. 작년 고위 법관직에서 퇴임해 변호사 개업을 한 B는 초임 판사 시절 모셨던 부장판사 -대법관을 역임하신 분으로서 최근 생을 마감하였다-와의 일화를 소개해주었다. 어려운 사건의 주심을 맡았던 B 판사는 도서관에서 그 사건에 딱 맞는 대법원판결을 찾아 부장판사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부장판사는 솔직하게 판결의 존재를 몰랐음을 숨기지 않고 B 판사를 칭찬해주며, "그런데 그 판결이 우리 사건에 맞는 것인가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B 판사가 그렇다고 하자, 부장판사는 "그런데 그 대법원판결이 맞는 판결인가요?"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B는 30년 가까운 기간 법관직에 있으면서 그때의 일을 되새기곤 했다고 한다.


    장면 #3
    최근 필자가 소속된 대학교는 중요한 소송을 제기해야 했다. 소송을 의뢰하기 위해 몇몇 법률사무소를 초청해 사안을 설명했는데, 예외 없이 "판례가 있어서…"라고 하면서 수임을 고사했다. 판례에 정통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실력이 쟁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누구 하나 부당한 판례를 깨보겠다고 말을 하지 않아 적잖이 놀랐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우리나라가 성문법 중심의 대륙법계 국가인지, 아니면 선례구속의 원칙을 따르는 영미법계 국가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로스쿨 체제에서는 과거 사법연수원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익혀야 할 판례가 늘어나 누가 얼마나 더 많은 판례를 숙지하고 있는가로 학생들을 평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러니 학생들은 판례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기르기보다는 이해하고 체화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들이 졸업하여 법률문제를 대할 때 대부분의 사안은 그간 갈고 닦은 법과 판례에 관한 지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법률환경의 변화에 따라 기존 판례가 더 이상 타당하지 않거나 새로운 사안이 발생했을 때, 그 지식은 오히려 짐이 될 수 있다. 법학계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판례평석 류의 논문이 나오고 있지만 대체로 기존 판례를 비판하기보다는 이해하고 구조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법학에서 상상력과 창의성은 금지된 덕목처럼 여겨지는 풍토가 있지 않나 싶을 정도이다.


    판결에 법적 확신이 더해져 사실상 규범력을 갖게 되면 판례가 된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우리가 속한 대륙법계에서 판결이란 당해 분쟁에 대한 결론일 뿐이다. 그 점에서 3년 차 변호사가 "판례에 집착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한 것이나 부장판사가 "대법원판결이 반드시 맞는 것이냐"고 반문한 것은 판례의 의의를 정확히 본 것이다. 판례맹신은 자칫 '법적 고민의 회피'를 넘어 '생각의 부재'를 낳기 쉽다. 다독(多讀)·다작(多作)·다상량(多商量), 즉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보는 것은 학자나 법률가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법학적 사색을 해보니 내 생각에 맞는 판례가 발견된다면, 자신의 생각이 검증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사색의 결과가 판례와 다르다면 다시 생각해보고, 그래도 맞지 않다면 조심스럽게 판례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것을 결코 호기나 가벼움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에는 '법의 문' 앞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제발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소연을 해도 그저 기다리라는 말에 순응하여 늙어가는 시골 사람이 나온다. 문지기는 자신이 열어줄 수 있지만 다음 단계의 문에는 자기보다 훨씬 강하고 더 무서운 문지기가 지켜 서 있다고 겁을 준다. 촌부는 그 말에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임종을 맞이하게 된다. 문지기는 청력이 약해진 늙은 촌부에게 큰 소리로 이 문은 너만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제 그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소설은 끝이 난다. 카프카의 소설은 난해하여 여러 가지로 해석되는데, 필자는 이야기 속 촌부를 기존 판례와 논리에 가로막혀 '진실의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소극적인 법률가로 이해하고 싶다.

     
    안식일에 쉬라는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냐고 일갈한 청년 예수의 법 해석이 2천 년을 넘어 지금도 유효하게 들린다.


    ※ 이 글은 10월 13일 열린 제2회 대한변호사협회 변호사학술대회에서 동 협회 학술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한 축사를 기초로 작성한 것이다.

     

    남형두 원장 (연세대 로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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