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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의 창] 윤형근의 “잔소리를 싹 빼버린” 단색화

    윤형근의 “잔소리를 싹 빼버린” 단색화

        1970년대 동경 미술계 진출을 기점으로 작가 경력의 새로운 장(章)을 써나가기 시작했던 단색화 화가들 중 제일 연장자는 윤형근 화백(1921~2007)이다. 동경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1976년에 그의 나이는 50대 중반이었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려 찬란한 천재성을 보여줬던 때가 25세였다. 그래서인지 서구 미술계에서는 ‘젊음=때 묻지 않는 전위적 창조력’이라는 공식이 은연중 힘을 발휘한다. 1970년대만 해도 파리 비엔날레는 참가 작가의 나이를 30세 미만으로 제한했다. 윤형근의 단색화는 젊은 예술적 재능과 감각이 피워낸 눈부신 꽃이 전혀 아니다. 그는 첫 개인전을 40대 중반인 1966년에야 열었고 그 후 10년 동안 조용한 모색을 하다가 50대에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APA) 대표)
    [미술의 창] 반일(反日) 감정이 왜곡한 '단색화 빠진' 단색화 담론

    반일(反日) 감정이 왜곡한 '단색화 빠진' 단색화 담론

      지난 칼럼(“청승과 국뽕을 넘어서: 김환기 점화의 국제적 인연”)에서 필자는 한국 미술 작품의 순혈적 독특함만을 내세우는 국뽕 미술 담론을 비판했다. 그런데 국뽕 담론은 여러가지 화장(化粧)을 하고 나타난다. 그중 하나는 한일 간의 역사적 상처를 이용한 반일 프레임이다. 일본과 교류한 미술가들을 작품 자체로 평가하지 않고 반(反)한국적이고 반(反)역사적이라며 정치적으로 단죄하는 것이다.지금 한국 현대미술을 세계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단색화(單色畵)에 대해 만들어졌던 담론이 전형적 사례이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ARKO)의 지원을 받아 1999~2003년 동안 진행된 ‘한국현대미술 다시 읽기’라는 프로젝트에는 당시 주요 미술 평론가들이 참여했다. 프로젝트 기획자였던 오상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APA) 대표)
    [미술의 창] 청승과 국뽕을 넘어서 : 김환기 점화(點畵)의 국제적 인연

    청승과 국뽕을 넘어서 : 김환기 점화(點畵)의 국제적 인연

      김환기의 점화 평론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구절이 있다. 김환기의 점 하나하나에는 가족, 친구,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들어있고, 자연의 영원을 시적으로 풀어낸 한국미의 정수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설이 나오게 된 것은 김환기가 남긴 일기의 일부 내용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일기에 외국 생활에서의 외롭고 센치한 심정을 토로했고, 달항아리와 한국적 미에 대한 예찬을 적었다. 그런 구절만 선택적으로 뽑아 놓으면 마치 김환기가 고국에 대한 애련함으로 한국적 순혈성을 지키다가 점화를 만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일기 전체를 보면 정반대의 이야기가 훨씬 더 많다. 외국 작가들에 대한 진지한 관찰과 그들의 강점을 흡수하려는 예술적 열의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늙은 피카소가 매일 아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APA) 대표)
    [미술의 창] 김환기의 점화(點畵): 달항아리의 흔적을 지운 추상적 도약

    김환기의 점화(點畵): 달항아리의 흔적을 지운 추상적 도약

      마티스와 피카소가 서양에서 추상화 시대를 여는 징검다리였다면 한국에서 그 역할은 김환기가 했다고 할 수 있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본인이 직접 추상화를 그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다른 작가들이 추상화 시대를 열었다. 반면 김환기는 구상적인 그림을 오래 그리다가 추상으로 변화했다. 서양에서 여러 세대에 거쳐서 나타난 변화가 한국에서는 한 사람의 화업사(畵業史)에 응축되어 있다.김환기는 1935년 동경에서 데뷔한 뒤 30여 년 동안은 달항아리, 구름, 산, 달, 새, 매화 따위를 간결한 형태로 축약하여 그리는데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이런 소재를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고, 간략한 형태들이 캔버스라는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하게 그려냈다. 김 화백이 가장 사랑한 것은 달항아리 이미지였다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APA) 대표
    [미술의 창] 말의 천재 피카소 “그림 그리는 건 맹인(盲人)의 직업”

    말의 천재 피카소 “그림 그리는 건 맹인(盲人)의 직업”

      현대의 많은 미술가들은 인스타그램이나 페북을 통해 자기 작품의 이미지를 올려놓고 홍보한다. 그 이미지 밑에는 해시태그 몇 개로 연결된 단어들이 있다. 이 분절된 단어들은 계속 퍼뜨려지고 반복되지만, 미술의 정수(精髓)를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것들을 찾기는 힘들다.피카소는 그림의 천재였지만 창작을 위해 천착한 자신의 경험을 시적(詩的)인 언어로 풀어내는 말의 천재이기도 했다. 지난 칼럼에서 나는 “예술은 진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거짓말이다”라는 피카소의 말을 소개하고 큐비즘을 설명했다. 그 외에도 피카소는 주옥같은 말들을 남겼다.피카소는 “나는 라파엘처럼 그리는데 4년이 걸렸고 어린아이처럼 그리는데 평생이 걸렸다”라는 말했다. 또 “프로같이 규칙을 배워라. 그러면 규칙을 깰 수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APA) 대표)
    [미술의 창] 큐비즘의 산(山)에 함께 오른 피카소와 브라크

    큐비즘의 산(山)에 함께 오른 피카소와 브라크

    피카소의 큐비즘에는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가 있다. 프랑스 화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이다. 브라크가 병원에 입원하자 피카소는 걱정이 되어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간호사는 “브라크 여사(Madame Braque)가 환자와 같이 계신다”면서 면회를 못하게 했다. 허탕을 치고 돌아간 피카소는 친구들을 만나 “내가 바로 ‘브라크 여사’라는 것”을 간호사가 모르고 있다고 화를 잔뜩 냈다. 피카소에 대한 브라크의 ‘사랑’도 못지 않았다. 브라크는 “나와 피카소는 같이 밧줄에 묶여서 큐비즘이라는 산에 올랐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피카소가 큐비즘을 발전시켜 나가던 시기에 브라크는 큐비즘의 원리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던 유일한 동료 화가였다. 둘은 큐비즘의 새로운 문법에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APA) 대표)
    [미술의 창] 피카소의 큐비즘: “진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거짓말”

    피카소의 큐비즘: “진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거짓말”

    피카소는 “미술은 진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거짓말이다(Art is a lie that helps us understand the truth)”라고 말했다. 피카소의 큐비즘 작품들을 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된다.<아비뇽의 처녀들>은 매춘부 다섯 명이 마치 무대에 있는 듯이 그린 누드화이다. 그러나 집단 누드화라는 사실보다 그림을 그린 방법이 특이하기 때문에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이 됐다. 여성의 몸통은 부드러운 곡선이 아니라 각(角)진 형태로 간결하게 그려져 있다. 겨드랑이를 보이며 공격적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여성의 팔꿈치는 V로 각지게 꺾여 있다. 입술은 도톰하지 않고 짧은 선으로 처리했다. 좌측 첫 번째 여성의 머리 위로 매니큐어를 칠한 손등이 보이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APA) 대표)
    [미술의 창] 천재 피카소의 모방과 창조

    천재 피카소의 모방과 창조

      추상화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마티스와 피카소는 서로 확연하게 다른 과정을 밟았다. 마티스가 뒤늦게 그림 공부를 시작한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이었다면, 피카소는 어릴 적부터 재능을 보였다. 또 대단히 많이 그렸다. 마티스가 총 1008점의 그림을 남긴 것에 비해, 피카소는 조각, 도자기, 판화 등을 제외하고도 그림만 1만3500점을 남겼다.피카소가 어렸을 때 그린 그림은 자신이 접한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여동생이 자수를 놓는 모습, 가족이나 친구들의 초상화, 동네 거지의 모습, 자신의 초상화, 종교적인 소재 등이었다. 우리가 지금 핸드폰으로 일상의 다양한 순간들을 찍듯이 피카소는 그림으로 그 순간을 기록하였다. 제2의 습관같이 그림을 그렸다.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APA) 대표)
    [미술의 창] 사진과 추상화

    사진과 추상화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느끼는 대로 그리는 마티스와 같은 화가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20세기에 추상화의 시대가 열렸다. 피카소와 같이 뜻밖의 형태로 실물을 재구성하거나 칸딘스키처럼 색과 선으로만 그리는 화가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실물을 그대로 재현하는 능력보다 화가의 느낌에 따라 실물을 재창조하는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추상화 조류를 만들어낸 또 다른 결정적 계기는 사진의 발명이다. 1830년대 은판 사진(daguerreotype)이 출현했을 때, 충격을 받은 화가 폴 들라호쉬(Paul Delaroche)는 “오늘부터 그림은 죽었다”라고 말했다. 화가의 손보다 더 정확하고 빠르게 실물을 재현하는 사진이 그림의 존재 기반을 무너뜨리는 폭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APA) 대표)
    [미술의 창] "당신보다 그림을 더 사랑합니다" - 마티스의 청혼

    "당신보다 그림을 더 사랑합니다" - 마티스의 청혼

      부거호우 교수로부터 “너는 절대 할 수 없을 거야”라는 얘기를 듣고 좌절하고 있을 때 마티스는 카미유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시골 출신이었던 그녀는 파리에서 모자 가게 종업원으로 빈곤하게 살았지만, 자기에게 어울리는 모자를 직접 디자인하고, 날씬하고 가녀린 자신의 몸매에 착 맞는 옷을 만들어 입으면서, 작은 사치를 즐길 줄 아는 명랑하고 자립적인 여성이었다. 카미유와 마티스는 동거를 시작했고 딸도 낳았다. 미혼모를 금기시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카미유는 생활비를 보태며 마티스를 뒷바라지했다. 그러던 중 꽁꽁 얼어붙었던 두 사람의 삶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마티스의 그림이 살롱 전시에 초대된 것이다. 카미유의 뒷모습을 그린 'Woman Reading'을 포함해 8점이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APA) 대표)
    [미술의 창] “너는 절대로 할 수 없을 거야” - 마티스의 좌절과 성공

    “너는 절대로 할 수 없을 거야” - 마티스의 좌절과 성공

    마티스는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와 실랑이 끝에 파리에서 1년만 미술 공부를 하기로 허락을 받았다. 마티스는 곧바로 파리국립미술대학에서 가장 유명한 부거호우(William-Adolph Bouguereau) 교수를 찾아갔다.   당시 부거호우는 화가가 꿈꿀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작품값이 가장 비싼 화가 중 한명이었다. 대학 내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이 있었다. 화가로 데뷔하려면 공식 살롱에서 전시를 해야 했는데, 전시 작품을 뽑는 결정권이 그에게 있었다. 그에게 인정받는 것은 화가로서 성공하는데 첫걸음이었다. 부거호우는 천재적인 기술과 능력을 지닌 화가였다. 그는 여성 신체의 아름다운 곡선, 천진난만한 어린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APA) 대표)
    [미술의 창] 색은 내 머리 속의 빛…마티스의 순수색과 시감(視感)

    색은 내 머리 속의 빛…마티스의 순수색과 시감(視感)

      앙리 마티스는 순수색(pure color)으로 강렬한 시감(視感)을 주는 근대 회화의 거장이다. 사업가인 아버지는 가업을 물려주고 싶었지만 체력이 허약한 마티스가 사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파리로 유학을 보냈다. 마티스는 예비법률시험 코스에 등록하여 공부를 한 뒤 고향에 돌아와 법률사무소 서기로 일했지만, 변호사가 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대신 사무소 일이 끝나면 독학 자습서를 보고 그림 공부를 했다. 첫 번째 작품을 완성한 것이 21세가 되던 1890년이었다. 함께 시대를 풍미했던 피카소에 비하면 한참 늦었다. 피카소는 그 나이가 됐을 때 이미 1000여 점을 그린 상태였다.   마티스는 결국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리에 가서 화가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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