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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자기

    우리 자기

    팔순 노파가 이웃집 노인의 바지 뒤춤에서 5만원을 절취한 사건에 대해 즉결심판을 한 적이 있다. 피고인을 호명하니 한 노인이 노파를 부축해 나왔다. 할머니는 거동도 불편했지만 인지능력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름과 생년월일을 묻자 ‘뭔 일이래’라는 표정으로 딴청을 피우신다. 법정은 대기 중인 피고인들로 만원인 상황. 속으로 경찰을 원망하면서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재판을 마치기로 마음먹었다. 할아버지를 할머니 뒤편에 앉히고 다시 물었다. “할머니, 뒤에 계신 분은 누구세요?” 한순간의 망설임 없는 명랑한 답변이 날아들었다. “응, 우리 자기!” 재판과 기억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객관적 증거 없는 재판은 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기억이 없으면 사실도 없다. 기억은 존재의 집이

    박주영 부장판사 (대전지법)
    유비쿼터스의 미래 화상공증

    유비쿼터스의 미래 화상공증

    인터넷 태동기인 1988년 미국의 사무용 복사기 제조회사 제록스의 마크 와이저(Mark Weiser) 박사가 '유비쿼터스(‘언제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하는’이라는 뜻의 라틴어 Ubique에서 유래) 컴퓨팅'이라는 용어를 주창한 이래 IT기술은 급속히 발달해 왔다. “인류의 가장 심오한 기술은 우리 일상생활 속으로 스며들어 생활의 일부가 된다”라는 와이저 박사의 명언처럼 현대기술은 순간순간 사라지면서도 어느새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변화를 만들고 있다. 공증 분야에서는 2010년 전자공증제도가 도입되어 컴퓨터로 작성한 계약서 등의 파일도 공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회사 정관이나 주주총회 의사록 파일에 전자공증을 받은 후 곧바로 전자등기 신청을 할 수도 있다. 디지털시대에 전자공증으로 법률관계의

    김윤섭 부장검사 (법무부 법무과장)
    보이는 것의 허상

    보이는 것의 허상

    얼마 전 지인이 사무실에 와서 하소연을 한 적이 있다. 살고 있는 집이 너무 오래돼 내부 인테리어를 할 마음으로 인테리어 업체와 공사계약을 하고, 계약서에 공사계약에 관한 내용, 인테리어에 사용할 업체 등을 빠짐없이 정하고 내부공사를 맡겼다고 했다. 그런데 공사를 마친 단계에서 보니까 욕실 겉모양은 깨끗하게 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방수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다시 공사를 하게 하였고, 실내에 설치한 수납장도 계약내용과 다르게 다른 업체 것으로 설치하여 이를 철거하고 계약대로 다시 설치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또 신발장도 설치과정에서 잘 보이지 않는 내부에 못이 튀어나와 문짝을 떼어내고 다시 설치하는 등 여러 차례 걸쳐 보수공사를 했다는 것이다. 지인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 사회는

    황정수 법무사 (대한법무사협회 법제연구위원)
    Passion. Connected.

    Passion. Connected.

    필자는 원주에서 태어나 정선에서 학창시절 대부분을 보낸 감자바우다. 그래서 이번에 강원도 평창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은 가급적 챙겨 보고 있다. 감동적이었던 퀸연아의 등장, 정성과 배려가 느껴졌던 바흐 IOC위원장의 개회사, 설산과 멋진 조화를 이뤘던 드론 오륜, 충격적 비주얼의 인면조 등이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여자 쇼트트랙 3,000m 계주 준결승에서 받은 신선한 충격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선수가 넘어졌다. 메달은 고사하고 17살 어린 선수 마음에 깊은 상처가 남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해설자들은 넘어질 때 "괜찮다,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월드컵 때마다 속아 왔던 해설자들의 말은 믿지 않은 지 오래다. 그런데 왠걸, 선수들은 포

    임형주 변호사 (법무법인 율촌)
    습설

    습설

    습기를 머금은 눈은 보통 눈보다 3배 정도 무겁다. 습설(濕雪)이다. 난분분 난분분 팔랑이는 눈발은 보기와 달리 조용하지만, 젖은 눈은 소란스럽다. 챠르륵 챠르륵 우산을 두드리며 이야기를 건넨다. 습설은 사연 많은 눈이다. 큰 눈 내린 날, 우산을 받치며 법원을 들어서다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눈도 제대로 털지 못하고 아침부터 법원을 드나드는 이들 역시 사연 많은 사람들이다. 각자의 이야기를 품안 가득 안고, 각자의 법정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잿빛 얼굴의 저 남자는 한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고, 눈이 퀭한 저 여자는 한참을 잠 못 이룰 것이다. 볼이 움푹 팬 저 노인은 벌금을 못 구해 노역을 살 것이고, 아들을 잃은 저 노파는 재판이 끝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릴 것이다. 눈물과

    박주영 부장판사 (대전지법)
    법치국가의 상소권 행사

    법치국가의 상소권 행사

    지난 달 23일 서울고검에서 제1회 국가송무 상소심의위원회가 열렸다. 작년 11월 전국 5대 고검에 중대 국가소송사건의 상소 여부를 심의하는 위원회가 설치된 후 부산·대전고검에 이어 3번째 열린 위원회였다. 이날 위원회에서는 ‘유럽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고 박노수 교수의 유족들에 대한 일부 손해배상을 인정한 제1심 판결에 대해 위원 전원일치로 국가의 항소포기를 의결하였다. 유럽간첩단 사건은 1960년대 발생한 대표적인 공안조작사건 중 하나로, 당시 박 교수는 해외유학 중 간첩활동을 하였다는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불법체포·감금된 후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기소돼 결국 사형까지 집행당하였다. 그 사건은 2015년 비로소 재심으로 무죄판결이 확정된다. 위원회에서 심의된 사건은 그 후 그 유족들이

    김윤섭 부장검사 (법무부 법무과장)
    수주대토(守株待兎)

    수주대토(守株待兎)

    이탈리아 시인 마리네티(Marinetti)는 프랑스 '피가로'지에 발표한 미래주의 선언에서 기계의 위력으로 출현한 새로운 세계를 환영하고 과거에 대한 모든 집착을 거부할 것을 주장했다. 미래의 진보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현실의 문제 자체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해결이 가능할까? 이미 지나간 시절을 운운하며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조직과 사람은 수주대토와도 같다. 그루터기(株)에 지키고(守) 앉아 토끼(兎)가 오기를 기다린다(待)는 의미이다. 지나간 행운을 못잊어 새롭게 변한 상황을 인정하지 않고 과거 방식만으로 대처하려는 송나라 농부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이야기이다. 이 고사가 나온 춘추전국시대는 변화와 불확실성

    황정수 법무사 (대한법무사협회 법제연구위원)
    응답하라 2018

    응답하라 2018

    2016년의 여름 나기는 힘겨웠다. 가뜩이나 무더웠던 데다 9월 말 시행되는 법률에 대비한 교육 및 어플리케이션 개발로 바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통을 안겨 주었던 장본인인 청탁금지법의 시행령이 개정돼 지난 17일 발효되었다. 이와 관련해 “7만원짜리 소고기는 선물해도 되는데 왜 2인분에 7만원짜리 불고기 전골은 같이 먹으면 안 되냐”, “커피는 사줘도 되는데 왜 커피 쿠폰은 주면 안 되냐” 등의 비아냥 섞인 질문을 받고 있지만, 그때마다 필자의 대답은 한결같다. “그래도 이만한 법이 어디냐.”  조선시대부터 뿌리 깊게 내려오고 각종 설문조사에서 줄곧 ‘퇴치되어야 할 범죄 1순위’로 꼽힌 것이 부정부패였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연줄문화는 넓은

    임형주 변호사 (법무법인 율촌)
    어떤 양형이유

    어떤 양형이유

    "가정이야말로 고달픈 인생의 안식처요, 큰 사람이 작아지고 작은 사람이 커지는 곳"이다(H.G.웰스). 가정이야말로 "찬밥처럼 방에 담긴 아이가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장에 나간 엄마를 걱정하며 애타게 기다리는 곳"(기형도 '엄마생각')이고, "십구문반(十九文半) 해진 신발을 신고 가족을 위해 온갖 험한 길을 마다않는 아버지가 사는 곳"(박목월 '가정')이다. 가난한 아버지는 마음대로 늙지도 못한다. 또 다시 십구문반 신을 신고 먼 길 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늙지도 못하며 악착같이 지키려 한 것이 바로, 가정이다. 해가 지면, 세상살이에 시달린 모든 이들은 절인 배춧잎처럼 녹초가 되어 타박타박 집으로 돌아가고, 그 곳에서 위로받고 잠이 든다. 실증적 연구결과를 동원하여 볼 필요도 없이, 가정 내 폭력

    박주영 부장판사 (대전지법)
     새로운 변호사시대Ⅳ-‘리걸테크(Legaltech) 혁신과 변호사의 지혜’

    새로운 변호사시대Ⅳ-‘리걸테크(Legaltech) 혁신과 변호사의 지혜’

    최근 BBC 뉴스에 인공지능(AI) 변호사와 사람 변호사 간의 대결에 관한 재미난 기사가 실렸다. 보험 사건들의 분쟁조정결과를 누가 더 정확히 예측하는지를 놓고 벌인 시합에서, 로스쿨생들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케이스 크런쳐 알파’라는 AI 프로그램이 영국 굴지의 로펌 변호사 100명을 이긴 것이다. 재작년 이세돌 9단 대 구글 알파고의 바둑대결처럼 변호사 영역도 AI의 도전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일까. 미국에서 개발된 AI인 ‘로스(ROSS)’는 초당 10억 장의 판례를 검토하며, 사람의 일상 언어를 알아듣고 법률문서를 분석한 후 질문에 적합한 대답을 추출한다. AI인 ‘컴퍼스(Compas)’는 법정에서 폭력사범인 피고인의 재범가능성을 분석해준다. 영국의 챗봇 ‘DoNotPay'는 인터넷 채팅으로

    김윤섭 부장검사 (법무부 법무과장)
    후견, 누구를 위한 제도인가

    후견, 누구를 위한 제도인가

    인간의 뇌는 우리가 아는 우주에서 최고로 복잡한 물체다. 우리의 뇌에는 뉴런(신경세포)이 1000억개쯤 있고, 그 각각이 다른 뉴런 1000개와 이어져 약100조개의 시냅스 연결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분자생물학, 유전자학, 뇌 영상 기술의 강력한 도구는 있지만, 치매, 우울증, 정신분열증, 양극성장애, 강박장애 등 정신장애를 실험실에서 확인하는 검사법은 아직 없다고 한다. 더구나, DSM-5에 포함된 정신장애는 어떤 합리적인 제거 과정을 거쳐 공식적인 지위를 얻은 게 아니라 현실적 필요에서, 역사적 우연성, 점진적 추가, 선례에 따라 편입되어 있을 뿐,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정의의 기준을 만족시켰기 때문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적 또는 법적으로

    황정수 법무사 (대한법무사협회 법제연구위원)
    기억의 불완전성

    기억의 불완전성

    최근 같이 일하는 선배 변호사로부터 책을 선물 받았다. 그 책에 재미있는 실험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요지는 이렇다.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공중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미국의 인지 심리 과학자 울릭 나이서 교수는 다음 날 학생들에게 설문지를 나눠주고 사고 당일 누구와 어디에서 폭발 소식을 들었는지를 적게 했다. 그리고 이를 보관해 두었다가 2년 반 후 학생들을 다시 불러서 챌린저호 사고 당일 누구와 어디에 있었는지 물어 보았다. 그 결과 학생들의 25%가 자신이 작성했던 설문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였고 나머지 상당수도 세세한 부분에서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설문지에 친구와 술집에 있었다고 썼는데 2년 반 후에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라디오로 소식을 들었

    임형주 변호사 (법무법인 율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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