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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法臺에서

    法臺에서 리스트

    이공계를 전공했더라면

    이공계를 전공했더라면

    지난 봄 출퇴근길에는 지하철역 구내 LED 광고판을 유심히 보면서 다니곤 했다. 그런 광고판들의 함체에 장착되는 모듈의 소자 제작 하자 사건을 담당하고 있던 때였다. 쟁점은 광고판 내부에 있기에 표면을 바라본다고 묘안이 떠오를 것은 아니지만, 광고판 내부의 구성 및 색상발현원리를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주변에선 20년 가까이 재판을 했으니 베테랑이라 하겠지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을 반영한 분쟁들은 늘 낯설기만 하다. 특히 건설사건 전담재판부에 근무할 때에는 남들은 그냥 지나칠 건물 외벽, 지하주차장 크랙, 아파트 조경수에도 눈길이 가고, 아이 체험학습을 위해 찾은 에너지재생시설에서는 작동원리를 쉽게 설명해 놓은 전시관을 꼼꼼히 살펴보기도 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재판했다는 비난이 나

    최성배 부장판사(서울중앙지법)
    고정재판과 불이익변경금지

    고정재판과 불이익변경금지

    검사는 경미사건에 관하여 서면심리에 의해 벌금 또는 과료 형을 정하도록 하는 약식기소를 할 수 있고, 법원은 약식명령을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피고인이 불복하는 경우, 일반사건과 같이 공판정에서 정식 증거조사를 거치는 심리를 다시 하게 되는데, 이를 고정재판이라 한다. 약식명령과 정식재판청구제도는 우리나라, 독일, 일본 등이 운영하고 있는데,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는, '피고인이 정식재판을 청구했다가 과중한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정식재판청구를 꺼린다'는 이유로, 1997년부터 심급 변동이 아닌 약식명령에서 고정재판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까지 불이익변경금지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고정재판에 불이익변경금지원칙을 적용하는 것에 대하여, 이미 수많은 문제점이 제기되어 18, 19대 국회에

    이현복 부장판사(강릉지원)
    소음과 집중

    소음과 집중

    무더위가 일찍 찾아오면서 필자도 사무실 창문을 열어놓은 채 근무하는 시간이 많다. 사무실이 대로변에 접해 있어 차량 통행 소음이 끊이지 않아 높은 데시벨 수치가 측정될 터이지만, 그런 소음이 묘하게도 업무에 집중하게 하는 효과가 있음을 느끼곤 한다. 적절한 소음이 집중력을 높여준다는 이론은 이미 실험들을 통하여 알려져 있다. 특히 여러가지 빛을 섞으면 흰색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 공기청정기 소리, 바람 소리, 빗소리 등과 같이 여러 주파수의 소리가 골고루 섞여 있는 '백색 소음'은, 작업에 방해됨이 없이 오히려 거슬리는 주변의 소음을 덮어주는 작용을 함으로써 집중력과 창의력을 높인다고 한다. 백색 소음을 들려주는 앱까지 나오고, 웅성거리는 카페 소음 속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도 이를 방증한

    최성배 부장판사(서울중앙지법)
    좋은 조정의 출발점

    좋은 조정의 출발점

    지방 도시에 내려와 근무를 하게 되니, 서울이나 수도권 등 인구 수백만의 대도시에 비하여 미국의 사회학자 쿨리(C.H. Cooley)가 개념정의한 가족이나 이웃 등 1차 집단 내에서의 분쟁 사건이 상대적으로 많고(그것이 이유의 전부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이유에서인지 강릉지역에는 조정이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다. 이곳에서 민사분쟁을 종국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야근을 밥 먹듯 하는 동료 법관들, 자신의 생업보다도 조정업무에 더 열의를 갖고 봉사하는 많은 조정위원들을 보면서 필자가 작년 서울중앙지법이 발간한 '조정마당 열린대화'에 글을 기고하면서 정리했던 조정과 판결에 관한 생각들 중 하나가 떠올랐다. 당사자 쌍방이 진정으로 승복하고 감동을 받는 조정을 좋은 조정, 당사자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

    이현복 부장판사(강릉지원)
    미괄식과 두괄식

    미괄식과 두괄식

    민사판결서를 작성하면서 쟁점에 대한 논리적 추론과정을 어떻게 기재할지 고민하다 보면 마치 탱그램(지혜의 판)을 요리조리 맞추는 것 같다. 요건사실을 직접 인정할 증거가 별로 없는 사안이 많아지다 보니 여러 간접사실을 모아 추정하는 기법을 자주 활용하면서 겪는 일이다. 돌이켜 보면 예전엔 '다음과 같은 사정 즉, ~점, ~점, ~점 등에 비추어 보면 ~ 이다'라는 표현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러한 미괄식 구성은 켠켠이 쌓여있다고 해서 '시루떡 문장'이라 불리며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결론에 대한 상세한 뒷받침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필자의 경우에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미괄식 논증방식이 선호된 데에는, 서술어가 맨 뒤에 오는 우리말의 구조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고, 판결서의 논증체계가

    최성배 부장판사(서울중앙지법)
    목숨 걸고 하는 재판, 소액·고정재판

    목숨 걸고 하는 재판, 소액·고정재판

    재판장 경력이 10년 정도가 되니 재판준비나 진행에 여유가 생길만도 하건만, 고정재판(형사사건 중 경미한 사건, 주로 몇 십만 원에서 몇 백만 원 사이의 벌금의 당부를 다투는 재판이다)을 진행할 때면 피해액수가 억 단위를 넘어가거나 사회적 이슈가 된 이른바 큰 사건을 맡을 때보다 오히려 더 바짝 긴장하고 집중하게 된다. 이런 습관은 2001년 공익법무관으로 근무하면서 유독 자주 들어가게 되었던 재판부의 재판장이셨던 고 한기택 부장판사님과 딱 한 번의 작은 인연(因緣)에서 비롯되었다. 변호인으로서 그 재판부의 수많은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도 나중에 법관이 되면 저 분처럼 좋은 재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초대받은 그 재판부의 회식자리에서(아마 내가 수임료 없이 공무로써 업무를

    이현복 부장판사(강릉지원)
    나의 스승, 나의 제자

    나의 스승, 나의 제자

    이른 출근길에 교대역에서 법원 동문을 향해 올라가다 보면 조정센터의 상임조정위원으로 활동 중이신 필자의 사법연수원 시절 지도교수님과 마주칠 때가 있다. 꼿꼿한 예전 모습 그대로이신 교수님께서는 아침인사를 반갑게 건네시고 조정센터 쪽의 지름길로 들어가시기 위해 동문 앞을 지나 지금은 3별관으로 불리는 구 연수원 방면의 인도를 걸어가신다. 그 뒷모습을 보노라면 필자가 연수원에 입소하였던 1992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면서, TV의 인문학특강에서 보았던 서울대 최인철 교수님의 강연이 떠올려진다. 1979년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 엘렌 랭어 교수가 '시간 거꾸로 돌리기'라는 연구를 하면서 70대 노인들을 외딴 곳에 모은 후 주변 공간을 모두 그들이 전성기를 보냈음직한 1959년의 풍경으로 꾸며 놓았다. 실내장

    최성배 부장판사(서울중앙지법)
    부모, 스승에 대한 단상

    부모, 스승에 대한 단상

    5월은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 전통사회와 관련한 기념일이 몰려 있어 해마다 이맘때면 부모와 자녀,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칼럼 기고를 맡은 기회에 지금의 내가 존재하게끔 만들어 준 부모와 스승들께 한 번에 감사를 드리는 호사(好事)를 누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 중 하나가 생각난다. 어떠한 사람에 대한 최고의 찬사와 최악의 모욕은 모두 부모, 스승과 연관되어 있고, 그래서 부모, 스승을 떼어 놓고는 사람의 삶을 생각할 수 없다. '누구 자식인데 저렇게 훌륭하냐', '누구에게 배웠길래 저렇게 훌륭하냐'는 것은 사람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되고, '누구 자식인데 저 모양이냐', '누구에게 배웠길래 저 모양이냐'는 것은 사람

    이현복 부장판사(강릉지원)
    변론 갱신, 한 바퀴 돌기

    변론 갱신, 한 바퀴 돌기

    2월 하순 법관정기인사에 따른 사무분담 변경이 있은 후 정신없이 달려온 두 달이 지나고 계절의 여왕인 5월에 들어섰다. 변경된 재판부에서 맞이하는 3월 한 달의 재판일정은 이미 전임 재판장님이 정해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 때 후임자로서 가장 힘든 것이 속행되어 온 사건의 기록을 검토하고 심리를 준비하는 일이다. 그래서 3월 재판일정을 마치게 되면 속행 사건들에 대한 파악이 거의 이루어지고 숨고르기를 하며 자신의 관점에서 심리방향을 설계해 보는 여유가 생기게 된다. 법관 사이에서는 이러한 신임 재판장의 3월 일정을 가리켜 '한 바퀴 돈다'는 표현을 쓴다. 전임 재판장의 메모를 물려받아 속행 사건을 검토하는 것이 고되기는 하지만 법관에게는 신선한 긴장감을 불어 넣어준다. 그리고 변론 갱신된 법정에 들

    최성배 부장판사(서울중앙지법)
    나누지 않은 죄

    나누지 않은 죄

    법관이 되고 형사재판을 몇 년간 담당하면서 재판과정이나 판결서 작성과정에서 실무상 문제되거나 반복해서 실수하게 되는 쟁점들을 정리한, 개인적으로는 보물 같은 자료(대단한 것은 아니고, 상당한 시간 정리하는 수고만 하면 어떤 법률가라도 쉽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들을 꽤나 고생을 하여 만들어 두었다. 이후 한동안 재판업무에서 떨어져 있다가 다시 형사재판 업무를 맡게 되면서 그 보물만 믿고 든든한 마음으로 새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아차! 몇 년간 고생해서 정리해 놓은 그 보물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몇 년간의 수고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다. 인사이동 후 이 곤란한 상황을 겪으면서, 문득 중학교(개신교 사립중학교를 다녔다) 시절 배웠던 성경구절 하나가 생각났다. '너희가 지

    이현복 부장판사(강릉지원)
    법원의 '얼굴'

    법원의 '얼굴'

    성적 수치심과 자살에 관한 특수연구를 구상하다 문득 데미안이 보고 싶었다. 내 기억으로는 데미안의 얼굴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나이를 초월한 얼굴이었다. 찾아보니 '여자의 얼굴도 조금 들어 있는 남자답거나 어린이답지 않지 않고, 나이 들었거나 어리지 않고, 왠지 수천 살은 되게, 왠지 시간을 초월한…' 등으로 묘사되어 있는 얼굴이었다. 내가 누군가의 편이라서기보다는 법원 편도 아니라서 미움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법원의 얼굴을 그리려다 데미안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여성이 소수인 법관생활의 결과인 것 같다. 훌륭한 판사가 된다는 것은 초월적 얼굴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반면 색깔로 보면 판사에게 어울리는 색상은 무색무취라는 의견이 많아서 칼라는 우리가 인지하는 세상이라는

    정지원 판사(서울서부지법)
    업무도 생활도 헌법기관으로...

    업무도 생활도 헌법기관으로...

    작년부터 법원 내 구성원들의 화합과 합리적인 생활문화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한창 진행되고 있고, 그 결과물도 여러 형태로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필자도 합의부 재판장을 맡을 수 있는 상황이 되니 합의부 구성원들의 생활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운이 좋게도 필자에게는 선후배 법관들 또는 기자들, 재조나 재야의 법조인들로부터 합의부 구성원들의 생활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좀 더 있었고, 그 이야기 중 하나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 표현은 부드러웠으나 조금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부장판사들은 '업무는 직장인처럼, 생활은 헌법기관처럼'하는 배석판사들을 싫어하고, 배석판사들은 '업무는 헌법기관으로서, 생활은 직장인처럼 하기를 요구'하는 부장판사를 싫어하니, 필자에게도

    이현복 부장판사(강릉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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