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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法臺에서 리스트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농아인 70대 후처가 평생 함께 살아 온 80대 본처를 둔기로 살해한 데 대하여, 집행유예가 아니라 상당한 기간의 실형을 선고한 사건이 최근 있었다. 인터넷 댓글을 보니, 아무리 그래도 살인은 살인이고 실형은 마땅하다는 견해와, 할머니의 답답하고 기구했을 인생과 그동안 쌓였던 울분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판결이라는 비판이 팽팽하게 공존한다. 같은 것을 같다고, 다른 것을 다르다고 판단하는 것이 바로 판사의 일이라고 배웠는데, 어째 이 일은 연차가 쌓일수록 더 어려워지기만 한다. 경제적으로 궁하여 십만 원을 훔친 것과, 재산이 넉넉한데도 순간적인 장난기로 십만 원을 훔친 것은 똑같은 십만 원 절도인가. 같은가 다른가. 다르다면 누가 더 나쁜가. 영원히 너만 바라보겠다는 혼인의 맹세가 채 시들

    이주영 부장판사 (서울남부지법)
    판사의 절값

    판사의 절값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자주 받지 못하던 시절, 설날이 너무 좋았다. 아침 일찍 세배를 하면 할머니는 꼬깃꼬깃 아껴두었던 용돈이나 사탕을 흔쾌히 내어 주셨다. 그 절값을 받을 마음에 들떠 아침 일찍 일어나 깨끗하게 세수를 하고 공손히 절을 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법대에 앉아 하루에도 수십 건씩 진행되는 사건을 지켜보자면 법정에 들어오고 나가는 당사자나 대리인들의 모습에도 눈길이 간다. 흥미로운 것은 재판장이 아닌 합의부 구성원이다 보니 그러한 모습이 보다 자세히 보인다는 것이다. 그 중에 유난히 재판정에 들어오고 나갈 때 법대를 향해 정중히 예를 표하는 분은 눈에 뜨이기 마련이다. 사실 법정 출입에 있어 예의를 갖추도록 하는 것은 여러 나라에 있는 일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높이 보장된다는 미국

    김영기 판사 (서울중앙지법)
    진정한 친구

    진정한 친구

    전래동화 중 ‘진정한 친구’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옛날 큰 부잣집 외아들이 있었는데, 친구가 많았다. 그런데 어느 깊은 밤, 아버지가 조용히 불러 죽은 돼지를 거적에 똘똘 말아 지게에 척 얹어 주더니 "그걸 메고 친구들을 찾아가 '내가 어쩌다 사람을 죽였는데 어쩔 줄 몰라 그만 메고 와 버렸다'고 해 보라" 하였다. 아들이 자신 있게 제일 친한 친구를 찾아갔는데, 이야기 듣고 지게 위에 얹힌 것을 흘긋 보더니만 그만 새파래져서 한참 있다 보자 피해 버리고, 다음 친구도, 그 다음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에 찾아간 친구 하나만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얼른 맞아들여 숨기고 함께 으슥한 곳을 찾아 거적에 말린 것을 묻어 주었고, 이에 아들은 그 많은 친구 중에 진정한 친구는 그 하나뿐임을 깨달았다…. 대략

    이주영 부장판사 (서울남부지법)
    합의부, 마음의 벽 허물기

    합의부, 마음의 벽 허물기

    요즈음 법원에서는 수년간 단독판사나 심지어 지방·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일해온 판사가 다시 합의부의 주심판사 역할을 맡는 일이 생기고 있다. 일정 연수 이상의 법조 경력을 갖춘 사람만이 판사로 임용될 수 있도록 한 법조일원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배석판사를 거쳐 단독판사, 부장판사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소위 도제식 시스템에 일대의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법조일원화 측면에서만 바라볼 것은 아니다. 법원 내부에서는 그간 부장판사와 배석판사는 그 역할은 물론 위상이 다르다는 암묵적 인식이 있어 왔고, 그러한 구분은 점차 두 그룹 사이의 벽이 되고 심지어 갈등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한편에서는 주심판사가 재판의 절차 진행이나 재판부 기일 운영에 관심이 없다고

    김영기 판사 (서울중앙지법)
    법관의 책임

    법관의 책임

    힘든 판결을 선고하고 지쳐 퇴근하던 어느 날이었다. 원고는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순간의 판단 실수를 하였을 뿐인데, 그에 비해 행정청의 처분이 너무 가혹하고, 그로 인해 원고뿐 아니라 주변인들의 삶이 엉망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그래 보였다. 변론 기일마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원고의 어머니는 기일을 거듭할수록 수척해졌고 선고 날에도 어김없이 나와 결국 깊은 울음을 터뜨렸다. 원고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호감이 갔고 많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법의 취지는 명확하였고, 원고의 여러 사정은 그와 같은 처분을 받은 다른 이들과 그의 사건을 달리 보도록 하기에 부족하였다. 이래저래 무거운 마음으로 차를 운전하던 중 전방에 정지신호가 들어왔다. 차를 천천히

    이주영 부장판사 (서울남부지법)
    판사들의 이사 몸살

    판사들의 이사 몸살

    바야흐로 꽃이 피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봄이다. 그리고 봄은 이사철이다. 이사를 앞두고는 마음이 심란해지기 마련이다. 살던 집을 단장하는 데 고심하기보다는 마음은 벌써 새롭게 살 곳에 대한 고민이 앞선다.  봄이 시작되는 2월 말경 인사철이 되면 법원에도 낯익은 풍경이 펼쳐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전국 전체 판사의 3분의 1이 넘는 판사들이 참고서적이며 업무용품 등을 바리바리 챙겨 전국으로 떠났고, 법원 내부 이동까지 포함하면 인사일을 기준으로 업무가 바뀌는 판사의 비율은 훨씬 높아진다. 이사는 종종 몸살을 앓게 한다. 그리고 판사들의 이사 몸살은 국민들에게까지 옮아간다. 인사이동이 다가오면 변론을 종결하기에 무르익지 않은 사건이나 중요한 증거조사가 예정된 사건 등은 부득이 인사이동 이후

    김영기 판사 (서울중앙지법)
    내 삶의 발자취

    내 삶의 발자취

    특허법원장실에 서산대사가 쓴 것으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시가 걸려 있었다. 이 시는 생전에 김구 선생님이 애용하시던 시였다고 한다. 법원장으로 있을 때 매일 이 시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아 보곤 하였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어지럽게 함부로 걷지 마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가는 이 발자취가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사람은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나, 그 이름과 발자취는 영원히 남게 된다. 최근 윤한덕 국립중앙의료원 응급구조센터장이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모두 자신만의 이익을 챙기는 이 시대에 이처럼 의롭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이 사회

    강영호 원로법관 (서울중앙지법)
    일상예찬(日常禮讚)

    일상예찬(日常禮讚)

    “지루함은 생각이 자라고 발전할 공간을 제공한다. 지루함의 올바른 활용법을 배우면 지루함은 만족스러운 삶을 창출하는 최적의 공간이 된다.”  - 마크 A. 호킨스 '당신에게 지루함이 필요하다' 중에서  오늘도 지극히 평범하고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이 반복된다. 특히나 법원의 일상은 재판이 진행되는 일주일 단위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난주와 같은 오늘이 끊임없이 반복되는지라 더욱 지루하고 권태롭다. 그래서 가끔은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는 상상을 해 보기도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향하는 곳은 어김없이 같은 자리다. 일상의 다른 이름은 공허함의 반복이고, 언젠가는 탈출하고픈 지루함이다.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항상 같은 검정색의 터틀넥과 청바지를 입는 지

    이은혜 판사 (서울동부지법)
    세상을 견고하게 하는 힘

    세상을 견고하게 하는 힘

    파리의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개최된 파리 만국 박람회 때 구스타프 에펠의 설계로 세워졌다. 높이가 300m로 당시로는 세계 최고였다. 총 철근의 무게는 7300t이다. 이 방대한 철근들이 모두 250만 개가 되는 리벳에 의하여 연결되어 있다. 에펠탑을 지금까지 지탱하고 있는 것은 거대한 철근이 아니라 이 철근들을 정교하게 이어주고 있는 리벳들이다. 만약 이 리벳 중 강도가 다른 것이 있거나 규격에 맞지 아니한 것이 있다면 무게 중심이 기울어져 결국에는 무너져 버릴 것이다. 이 리벳을 관리하기 위하여 구스타브 에펠은 수 천장의 도면을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거대한 제도가 아니라 그 제도를 정교하게 이어 주고 있는

    강영호 원로법관 (서울중앙지법)
    걸림돌(Stolperstein)

    걸림돌(Stolperstein)

    독일 도시의 거리를 걷다보면 곳곳에서 ‘걸림돌(Stolperstein)’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걸려 넘어지게 바닥에 설치한 거친 돌이라는 의미로 나치 강제수용소에 끌려간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명판이다. 1992년 독일의 행위예술가인 귄터 뎀니히가 나치 정권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 등을 추모하며 발에 걸리는 돌처럼 이들의 비극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취지에서 보도블록을 깨고 그 자리에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을 설치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2015년 6월까지 독일을 포함한 유럽 18개국에 총 5만 3천 개 이상의 걸림돌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독일 국민들은 도시 곳곳에 설치된 걸림돌로 인해 적지 않은 불편을 느끼면서도 이를 불편하다 말하거나 걸림돌을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희생자

    이은혜 판사 (서울동부지법)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지하에는 많은 훌륭한 사람이 묻혀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좋은 대리석에 비문을 적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비문은 화강암으로 된 초라한 한 주교의 비문이다. 그 비문의 내용이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그 비문에는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의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크나큰 꿈을 가졌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 넓은 시야를 조금 좁혀 내가 살고 있는 국가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을 한다. 그러나 그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나의 자존심으로 나의 가장 가까이 있는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는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는

    강영호 원로법관 (서울중앙지법)
    이모티콘의 사회학

    이모티콘의 사회학

    최근 SNS(Social Network Service)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재판에도 당사자들 사이에 스마트폰 메시지나 카톡으로 주고받은 대화내용이 증거자료로 자주 등장하곤 한다. 심지어 요즘에는 차용증이나 계약서를 서면으로 작성하지 않고 주요내용을 문자 메시지 등으로 주고받은 후 그 대화내용을 증빙자료로 남겨 놓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증거자료로 제출된 SNS 대화내용을 보면 ‘텍스트’ 못지않게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이모티콘(Emoticon)이다.  공통된 학습체계도 없고, 표준 사용규칙도 없이 간단한 문자나 기호로 구성된 이모티콘은 이미 우리 사회 안에서 언어적 특성을 함유한 채 활발히 통용되고 있다. 이모티콘은 기성 언어에 비하여 표정과 행위, 감정을 간단한 문자나 기호로 형상화함으

    이은혜 판사 (서울동부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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