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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쉽게 씌어진 시(詩)

    쉽게 씌어진 시(詩)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윤동주의 ‘쉽게 씌어진 시(詩)’ 중에서 - 영화 ‘동주’를 보면, 시대의 비극 앞에 소극적인 자신과는 달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는 사촌 송몽규에게 깊은 열등감과 자괴감을 느끼던 윤동주가 ‘쉽게 씌어진 시(詩)’를 통해 내면의 열등감과 자괴감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 윤동주를 향해 송몽규는 시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이름 뒤에 비겁하게 숨는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윤동주는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스물 여덟 해의 짧은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인생의 굴곡마다 시를 썼다. 일제 강점기의 비극적 시대가 아니더라도 우리 인생은 여전히 살기 고달프고 버겁다. 특히 법정에 서는

    이은혜 판사 (서울동부지법)
    큰 것은 작게, 작은 것은 크게 보자

    큰 것은 작게, 작은 것은 크게 보자

    이건세 교수의 사진 잘 찍는 법 중의 하나가 '큰 것은 작게, 작은 것은 크게 보라'는 것이다. 끝도 없이 펼쳐진 대평원, 그랜드캐니언 같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 등을 사진에 담으려면 조물주의 시각을 가지고 그 대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조물주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들은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 한 송이 아름다운 장미꽃을 담기 위하여는 벌의 입장에서 그 대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벌의 입장에서 보면 그 꽃은 거대하고 웅장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재판도 마찬가지다. 언론의 주목을 받고 파급 효과가 큰 사건들은 멀리서 보아야 올바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멀리서 봐야 그 사건의 윤곽이 보이고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너무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하다 보면 큰 줄기를 놓쳐버리거나

    강영호 원로법관 (서울중앙지법)
    아리송한 나라 걱정

    아리송한 나라 걱정

    ‘이러다 나라가 망하면 어쩌나.’ 행정사건의 결론을 고민할 때 많이 떠오르는 생각이다. 위조 여권으로 입국한 전력이 있는 사람을, 그 이후의 사정을 고려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면서 한편으론 잘못된 풍토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진 않을지 걱정이 된다. 다발성 경화증처럼 희귀하고 발병 원인도 불분명한 질환을 산업재해로 인정하면서는 자칫 기업 환경, 나아가 국가 경제가 어려워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고개를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물며 엄청난 세금이 투입된 국책 사업에 관한 사건인 경우에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다. 이런 걱정에 무게가 실린 판결은 때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사실 ‘나랏일’을 다루는 법원에서 나라 걱정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하다. 매 사건 개인의 가치와 국가의

    한지형 판사(서울행정법원)
    "예술이야!"

    "예술이야!"

    필자를 비롯한 모든 판사들은 물론 모든 직업인들이 자신의 작업결과나 직무수행에 대하여 가장 듣고 싶은 하는 말은 바로 이 말일 것이다. "예술이야!"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평가는 매우 주관적인 것이어서 누군가에게는 황홀할 정도로 멋지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형편없는 쓰레기로 평가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마크 로스코라는 작가는 빨간색 네모 모양을 주로 그리는데 그림이라기보다는 캔버스의 면을 3개로 분할하여 2-3가지 색깔로 칠할 것에 불과함에도 그의 작품은 크리스티 경매에서 무려 911억 원에 낙찰된 바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리움미술관의 제일 좋은 명당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거대한 사이즈와 강렬한 색채를 통하여 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고 있다. 또한 루치오 폰타

    박영호 부장판사(서울중앙지법)
    만져만 주어도

    만져만 주어도

    "대체 기준이 무엇이냐"는 원고의 말에 행정청은 간단히 답한다. “매뉴얼에 나옵니다.” 규정대로 했으니 무조건 적법하다는 건데, 아무리 법전을 뒤져도 그 기준이란 게 보이지 않는다. 물어보니, 고시를 구체화한 내부 지침을 말하는 모양이다. 법률에서 규칙·고시 등에 세부 기준을 위임한 경우에 발생하는 이런 실랑이는 행정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복지 행정이 문제 된 사건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장애의 유형을 열거하고 거기에 해당하지 않으면 장애인 등록 신청을 반려한다든지, 노인 장기요양급여 지급 조건을 정해 두고 그에 어긋나면 지급했던 것을 환수한다든지 하는 과정에서 분쟁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한정된 예산으로, 효율과 형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은

    한지형 판사(서울행정법원)
    떼창!

    떼창!

    하계 휴정기를 통하여 많은 법조인들이 폭염 속에서 방전된 체력을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쳇바퀴 돌듯이 일정한 일상생활을 벗어나 시원한 계곡이나 바닷가에서 가족들과 보내는 여유로운 시간이야 말로 방전된 휴대폰을 충전해 주는 휴대폰 충전기처럼 우리들에게 남은 한해를 버티게 해줄 수 있는 힘과 체력을 충전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외국의 가수들은 내한공연을 와서 영어도 사용하지 않는 우리나라 관객들이 자신들 노래의 영어가사를 외워서 동시에 떼창을 하는 것을 듣고 감동을 받아 향후 수년간 노래를 만들고 공연할 수 있는 엄청난 동력을 얻어 간다고 한다. 필자 또한 우연히 길을 가다 마주친 동료 법조인들이 그들이 읽은 필자의 칼럼 제목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앞으로 더 재

    박영호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판사도 보기 힘든 기록

    판사도 보기 힘든 기록

    “다음 주에나 복사할 수 있다고 하니 기일을 변경하여 주십시오.” 경찰 단속에 터 잡은 행정사건을 다루다 보면 형사재판 기록에 대한 문서송부촉탁을 하는 일이 많은데, 거의 예외 없이 이런 기일변경신청이 들어온다. ‘형사 기록은 아직 종이였지’ 하는 생각과 함께 형사재판을 하던 때가 떠오른다. 기록을 검토하려고 했더니 공판검사가 대출해 가서 기록이 없단다. 재촉해서 받아왔더니 이번엔 열람 신청이 들어왔단다. 기록을 독차지하고 차분히 보려면 야근하는 수밖에 없다. 무더운 여름 밤 골무를 끼고 기록을 보던 중, 서증 조사할 때 나왔던 얘기를 찾고 싶은데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앞으로 뒤로 한참을 뒤적인 다음에야 수사보고서 어디에 적혀 있는 걸 찾았다. 유레카의 기쁨은커녕 한숨만 나온다. 형사재판 기

    한지형 판사 (서울행정법원)
    투타겸업 판사!

    투타겸업 판사!

    현재 미국 메이저 리그 LA 에인절스 소속 투수 및 외야수로 뛰고 있는 일본인 야구 선수 오타니 쇼헤이는 투수와 타자를 겸하는 ‘이도류’(二刀流) 선수로 유명하다. 일본 프로야구 니폰햄 파이터스에서 선수로 뛰던 2016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처음으로 ‘두 자릿수 승리·100안타·20홈런’을 달성했다. 투타 모두 팀의 주력 선수로서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큰 기여를 했고, 미국 메이저 리그에 진출해서도 투수와 타자 역할 모두를 잘해내고 있다. 그런데 판사들의 경우에도 야구선수의 경우처럼 투수와 타자 2가지 역할 모두를 잘 해내는 투타겸업 판사가 최고로 인정받는다. 판사들의 경우 통상 ① 판결 선고 시 쌍방 당사자가 모두가 불만을 가진다는 이유로 조정을 선호하면서 조정을 성립시

    박영호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묘한 감정

    묘한 감정

    “감정만 하면 무조건 보상금이 올라가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손실보상금 사건의 피고가 흔히 하는 이야기이다. 남의 땅을 쓰려면 헌법과 법률에 따라 정당한 보상을 해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항상 객관적인 시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니 전문가에게 시가 감정을 맡기게 마련이다. 협의, 수용재결, 이의재결, 그리고 소송에 이르기까지 매 단계 감정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매번, 보상금이 조금씩 증액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사유가 딱 떨어지는 것만도 아니다 보니 불신이 시작된다. 재판은 그저 보상금이 늘어나는 한 과정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토지의 모양이나 도로 접근성 등의 차이에 관한 감정인의 판단은 손실보상 소송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원고로서는 기존 절차에서 이루어진

    한지형 판사 (서울행정법원)
    천사부장!

    천사부장!

    최근 사무분담의 변경으로 민사항소 재판부의 부장으로 보임을 받게 되면서,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두루 섭렵하여 취합한 천사부장이 되기 위한 행동요령은 다음과 같다. 1. 배석판사님들과 사이에서는 출, 퇴근 인사를 생략하는 한편 칼 퇴근을 하여 저녁 식사를 같이 할 기회 자체를 만들지 말고, 신건메모는 직접 작성하며, 조정사건은 부장이 직접 처리하되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일수록 조정으로 종국해서 작성할 판결문 수를 최소화할 것. 2. 법원 직원들과 사이에서는 정확한 시간계산을 토대로 한 적정한 기일지정과 신속한 재판진행으로 퇴근 시간 이전에 재판을 종료하고, 휴가 및 출장계획은 미리 공유하며, 분기에 1번씩 뮤지컬 감상, 야구장 단체 관람 등 기억에 남을 이벤트를 열어 줄 것. 그런데 실제

    박영호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판사라는 마음으로

    판사라는 마음으로

    명색이 판사인데, 틀리면 어쩌나. 얼마 전 ‘당신이 판사입니다’라는 온라인 양형 체험을 해보면서 든 생각이다. 반드시 그것만 정답이랄 수도 없는 일이고 누가 알 것도 아니지만 왠지 걱정되어 주위를 살피며 몰래 해보았다. 양형위원회가 출범한 지 10년이 지났고 대부분의 범죄 유형에 양형기준이 마련되었지만 '솜방망이', '고무줄' 등 양형에 관한 비판 기사의 단골 용어들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가끔 댓글을 보면 일반 국민들이 ‘어이없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점점 많아지는 것만 같다. 분위기를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재미난 프로그램을 만든 모양이다. 양형은 판사에게도 어렵다. 요소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저마다의 기준으로 그 요소들을 저울질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양형기준

    한지형 판사 (서울행정법원)
    법대는 trench(참호)가 아니라 bench입니다

    법대는 trench(참호)가 아니라 bench입니다

    근래에 벌어지고 있는 법원 내부의 사태는 필자로 하여금 도무지 어떠한 글도 쓰기 힘들 정도로 마음과 몸을 아프게 만들었다. 필자는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가 내 삶의 10가지 철학 중 하나일 정도로 ‘법관’이라는 직업이 주는 가오를 소중히 여겨 왔는데(서울중앙지방법원 법원칼럼 2017. 5. 1.자 참고), 근래의 사태로 인하여 필자를 비롯한 주변 판사들의 가오는 땅 바닥에 떨어진 듯하다. 법관으로서 가오 하나만을 근거로 법관 경력 기간 동안 가족들과의 행복한 시간을 희생해가면서 재판 기록과 사건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과 묵묵히 씨름하였던 대부분의 평범한 법관들의 허망함과 허탈함은 도대체 누구로부터 어디에서 어떻게 보상받으라는 것인지 참으로 안타깝다.  영어로는 판사가

    박영호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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