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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法臺에서 리스트

    뒤끝

    뒤끝

    욱하지만 뒤끝은 없는 그가 이혼 법정에 섰다. 그의 아내는 이십여년 전 폭행의 기억까지 낱낱이 들추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아내의 뒤끝을 탓했다. “언제 일인지, 왜 그랬는지 생각도 잘 안나요. 그 때 미안하다고도 했고요. 싸울 때마다 옛날 일까지 모조리 끄집어내니 자꾸 더 싸우게 되죠. 뒤끝이 길어도 어쩌면 저렇게 긴지 모르겠어요. 저는 좀 욱하긴 하지만, 그래도 뒤끝은 없다고요.” 혼인 기간 동안, ‘욱하는’ 그는 종종 집안 살림을 부수거나 아내를 때렸다. 그리고 ‘뒤끝이 없는’ 그는 다음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내를 대했다. 그렇지만 아내는 쉽게 마음을 풀지 못했다. 그때마다 그는 아내를 ‘꽁하고 소심한 성격’이라 탓하며, ‘뒤끝 없이 화통하고 시원한 성격’인 자신을 좀

    권양희 부장판사 (서울가정법원)
    노력하려는 마음

    노력하려는 마음

    새로 배당된 사건을 대하면 어려운 내용이 많다. 아는 줄 알았는데 들여다볼수록 정확히 알고 있는지 의문일 때도 있다. 재판은 세상과 사람에 관한 일인데, 법 공부 뿐만 아니라 세상 공부와 사람 공부가 부족하여 아는 것만 알고 느끼는 것만 느끼기 때문이다. 어릴 적 Garden은 비싼 고깃집, Park는 여관인 줄만 알았다. 커서는 커피나 와인의 여러 맛을 식별할 줄 알고 남다른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다니는 것, 비가 오면 울적해지고 야밤에 슬픈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맺히는 것에서 감수성의 징표를 발견했다. 흔하고 쉬워서다. 자연스레 법치주의는 ‘법질서 준수’로, 재판은 법원에 ‘받으러 오는’ 것으로 인식하였기에, 판사가 결론을 ‘내려주면서’ 당사자를 야단치거나 훈계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다.

    최기상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마지막 한마디

    마지막 한마디

    엄마이자 아내로서 행복하게 살아가던 명문대 교수가 조발성 알츠하이머에 걸려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린 ‘스틸 앨리스(Still Alice)'라는 영화가 있다. 언어학자인 앨리스는 자신이 말을 잃어가고 있음을, 기억과 판단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그로 인해 자신을 잃어가고 있음을 담담히 고백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병의 모습일 뿐이라고 덧붙인다.    앨리스는 말한다. “저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애쓰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 예전의 나로 남아있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살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요.”   가정법원에는 ‘나’를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이 온다. 

    권양희 부장판사 (서울가정법원)
    시절과 법

    시절과 법

    국정농단과 탄핵심판에서 드러난 ‘블랙리스트’에 관하여 법조인이자 고위 공직자였던 이들의 직권남용에 대한 판결이 선고되었다. 재판을 방청하면서 권력과 돈에게 법은 무엇이었을까 시절을 따라 물었다. 내가 태어난 1969년은 21살의 노동자가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만들어 근로기준법을 읽다가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때다. 법보다 주먹이 앞서던, 법이 권력과 강자의 폭력으로부터 약자를 지키지 못한 기나긴 시절. 그 청년 노동자는 22살에 ‘온갖 곤경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기 시대를 멈추게 한다.’ 이후에도 법은 안보나 질서를 빙자하여 국가폭력과 권력남용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동원되기 일쑤였다. ‘육법당’과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기억되는 1980년대엔 “

    최기상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그들의 두 번째 눈물

    그들의 두 번째 눈물

    소년이 같은 학교 여학생을 추행했다. 어이없게도 소년은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사건을 떠벌여 댔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무 일 없었던 듯 묻혀버렸을 것이다.    소년은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결정에 따라 전학을 갔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네 거리를 배회하며 학교 친구들을 만나고 근처 학원을 다녔다. 등·하굣길이 좀 멀어졌을 뿐 소년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피해 여학생이 소년과 마주치지 않을 먼 곳으로 이사를 하고, 전학을 갔다.    소년의 부모는 아들의 선처를 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소년은 착한 아이다, 여학생이 문제다, 부모가 이혼을 했다, 가출을

    권양희 부장판사 (서울가정법원)
    시민 주도 개헌

    시민 주도 개헌

    제헌절이다. 국회는 작년 12월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발족하여 ‘국민과 함께 하는 상향식 개헌’을 내걸고 헌법개정절차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국민은 여론 수렴 대상일뿐 개헌의 주체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으며, 정치인과 전문가가 다듬은 개헌안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헌법은 시민의 권리장전이자 국가 공동체를 어떻게 구성할지 정하는 최고의 사회적 약속이다. 개헌은 주권자이자 헌법개정권력자인 국민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데, 헌법에는 개헌에 대한 국민 참여로서 국민투표만 명시되어 있으므로, ‘국민과 함께 하는 개헌’이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직접 개헌안을 만들도록 ‘(헌법개정) 시민의회’를 구성하는 게 필요하다. 시민의회는 개헌뿐 아니라 선거제도 개혁, 기본소득과 대체복무제 도입, 탈핵 등 국가적

    최기상 부장판사 (서울중앙지법)
    혼자만의 자유

    혼자만의 자유

    영화 시작 10분 전. 그는 너무도 익숙한 듯 햄버거 봉지를 입에 문 채, 두 손으로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상영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적당히 자리를 잡는 동안, 어느 누구도 그를 도와 휠체어를 밀어주거나 햄버거 봉지를 들어주지 않았다.    사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수많은 타인들 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햄버거를 먹으며 영화를 감상했다.    수년 전, 미국 연수중에 있었던 일이다. 스스로 불편을 이겨낼 의지만 있다면 혼자서도 휠체어에 앉아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것에 적잖게 놀랐던 기억이 있다.    돌아와, 그동

    권양희 부장판사 (서울가정법원)
    참여와 견제

    참여와 견제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가 “전쟁은 너무 중요한 일이어서 군인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다”를 인용하면서 강조한 “헌법은 너무나 중요하기에 헌법재판소에만 맡길 수 없다”는 말에서 ‘정치-정치인’과 ‘시민 참여적 재판’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금은 시민이 재판의 수요자나 사법의 객체에 그치지 않고 사법기관의 구성과 사법작용에 참여하여 주체가 되고자 하는 때이니까. 4월 27일 헌법재판소에 ‘공무원 직장협의회’가 설립되었다. 헌법재판소가 1988년 창립한 지 29년만이다. 직장협의회에는 사무처 6급 이하 대상 공무원의 80%가 가입했다. 직장협의회는 김 후보자에 대하여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의견에 걸맞게 하위직 직원도 인격적으로 대하는 인물”이라고 의견도 냈다. &nb

    최기상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버려지고 버려지다

    버려지고 버려지다

    “더는 안 되겠어요. 무단결석에, 가출에, 술, 담배까지. 얼마 전엔 다른 아이들 지갑에까지 손을 댔어요. 아이들이 자꾸 보고 배운다고요. 절대 다시 안 데려갑니다.”  함께 온 보육시설장은 소년에게 잠깐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소년 역시 불만 가득한 얼굴로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보육시설장이 직접 통고한 사건이었다.    다른 사건에 비하여 심각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고, 가출이라 해봐야 하룻밤이었다. 그렇지만 시설장은 더 이상 소년을 시설에 둘 수 없다면서, 소년보호시설에 감호 위탁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6개월의 처분기간이 끝나더라도 소년을 다시 데려가지는 못한다고 덧붙였다.   소년은 제 부

    권양희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
    만만한 판사

    만만한 판사

    한국고용정보원이 3월에 발표한 ‘2016년도 직업만족도(사회적 평판, 급여만족도, 직무만족도, 직업지속성 등) 조사에서 판사가 1위였다’는 보도는 법관의 퇴임사에서 ‘대과 없이 마쳤다’는 말을 들은 때처럼 민망하였다. 당사자의 판사만족도나 재판만족도라면 모를까. 시민들의 문제와 고통에 주의를 기울여 정성껏 재판하라는 취지인 공동체의 통큰 존중과 뒷바라지가 판사의 만족이나 행복과 결부될 수도 있다는 게 아쉬워서다. 어느 판사의 고백처럼, 법관은 매우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는 직업이면서 동시에 엄중한 직분임에 틀림없으나, 그 법관의 직을 수행하는 ‘나’는 보잘 것 없고 평범한 인간이다. 재판에서 누군가는 패소하고 유죄를 선고받으며 심지어 오판에 억울해 한다. 그럼에도 그 재판을 기꺼이 떠맡아

    최기상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그들의 마음을 되돌리는 법

    그들의 마음을 되돌리는 법

    응급실. 학대가 의심되는 아이를 진료한 의사가 몰래 112 신고를 하자, 순식간에 도착한 경찰이 병원이 떠나가도록 외쳤다. “아동학대 신고하신 분~?!!” 오래 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설마 실화일까 싶다. 아동학대 신고 경험이 있는 의사와 교사를 만났다. 대부분 신고 후에 경찰로, 검찰로 진술하러 다니느라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경찰에서 이미 한 번 이야기 했는데, 검찰에서 또 부르더라, 진료나 수업에 지장이 있어 안 되겠다 했더니, 그럼 재판 때 법원에 가서 증언해야 한다 하더라. 그래서 과태료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신고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고 했다. 극심한 항의에 힘들었다고도 했다. 왜 신고했느냐는 타박 정도는 애교라고 했다. 그냥 두지 않겠다는 협박, 밤길 조심

    권양희 부장판사 (서울가정법원)
    지금 이대로라도

    지금 이대로라도

    대법관과 헌법재판소장 인선 절차가 진행 중이다. 그들은 단순히 판단자가 아니라 사법 정의(Justice) 자체이기에, 그 자격에 표하는 존경의 결은 특별하다. 부동산·주식을 통한 불로소득의 추구나 자녀교육을 위한 위장전입 따위의 불의를 저지르지 않았다가 아니라, ‘소수자와 약자,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자’에 대한 불의를 묵과하지 못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행동한 이야기와 헌법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태풍에 맞서는 ‘첫 파도’인 적이 있는지 듣고 싶다. 그들의 감수성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믿음이 차별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거나 비판할 줄 아는 민감함’(신형철)이기를 기대하며, ‘내가 우월한’ 관계가 아니라 ‘함께 대등한’ 관

    최기상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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