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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미술 이야기 리스트

    (34) 봉래각 현판 탁본 글씨

    (34) 봉래각 현판 탁본 글씨

    강원도는 조선시대에 강릉과 원주를 두고 지은 것인데 구한말에는 춘천이 크게 부각되기도 했다. 하여 강원감영(江原監營)은 거의 원주에 두었고 구한말에 잠깐 춘천으로 옮겼다. 그 당시 원주가 물산이 풍부하다거나, 큰 인물이 난 것도 아니면서 강원도의 중심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에 무슨 일로 원주 시내에 있는 강원감영 터에 간 적이 있었다. 현재 강원도청(江原道廳)이 들어선 곳이다. 필자가 원주 시내에서 60여리 떨어진 귀래(貴來)라고 하는 미륵산 자락의 마을에 살 때였다. 감영터라 할 만한 것은 동헌 정문인 선화당(宣化堂)만 덩그라니 남아있던 것만 기억에 남아있다. 그 후로 그 곳에 거의 간적이 없고, 고향에 내려 갈 때에도 원주 시내보다는 그 인근 지역으로 돌아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33) 김광수의 자찬묘지명

    (33) 김광수의 자찬묘지명

    조선후기 영정조 시대에 오면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는 청나라의 영향이 지대하였고 또 약간의 생활여건이 그 전 보다는 나아졌기 때문이다. 지금 말로하면 약간의 세계화가 되었다고 할까? 아니면 아주 보수적인 주자학 일변도의 학문성향에 식상한 지식인이 등장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그림,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의 문장,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글씨 등이 이런 추이의 한 축을 이루면서 문화의 다양성을 발전시켰다. 상고당 김광수(尙古堂 金光遂: 1696.12.18-1770.8.13)는 바로 이 시기에 골동수집으로 이름을 날렸다. 영조 때에 활동한 대표적 문벌 좋은 집안의 지식인으로 벼슬보다는 골동품에 취미를 가져 일생을 서화(書畵)와 고동(古董)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32) 완구유집(宛丘遺集) 2책

    (32) 완구유집(宛丘遺集) 2책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담소하다 우연히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조선시대에 나온 책 중에 활자본이나 필사본 중에는 이런 저런 책이 좋다는 말을 하면서도 정작 가장 많이 책으로 나온 목판본 중에서 가장 좋은 책은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나는 묻자마자 10권2책으로 꾸며진 '완구유집(宛丘遺集)'(사진)을 첫째로 꼽을 것이라 했다. 이 책은 조선후기 경학과 문장으로 이름이 났던 완구 신대우(宛丘 申大羽: 1735-1809)의 문집이다. 조선시대에 나온 책은 대부분 그 책이 어떻게 나오게 된 내력에 대해 언급한 글이나 간행기(刊行記)가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이 완구유집에도 책의 발간 경위나 발간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대부분 다른 책에는 서문과 발문이 있는데 이 책에는 목록만 있을 뿐 그 흔한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31) 자하의 雅顔使君壽詩

    (31) 자하의 雅顔使君壽詩

    골동을 거래하다 보면 문득문득 오래된 물건에는 귀신이 붙어 있다고 하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실감이 날 때가 있다. 이'아안사군수시(雅顔使君壽詩)'(사진) 편액 글씨는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7)가 후배(後輩)인 기원 민노행(杞園 閔魯行: 1777~1845?)의 회갑에 써준 축수(祝壽)의 시다. 자하와 이 댁과는 예부터 세교(世交)가 있어 민노행의 부친과는 잘 아는 사이라는 사실이 자하의 시집인 '경수당전고(警修堂詩藁)'에 실려 있는 여러 편의 글에서 알 수 있다. 아안(雅顔)은 민노행의 자요, 사군(使君)은 군수를 지칭하는 단어다. 그러니 민노행이 화순(和順)고을을 맡아 다스릴 때에 자하가 보낸 글임을 알 수 있고, 회갑에 조그만 고을의 원님을 겨우 한 민노행의 벼슬은 별로 높지 않았음을 또 알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30) 추사의 전당시서서

    (30) 추사의 전당시서서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는 학문이 가장 뛰어나고 다음으로 글씨인데 세상에는 서예가로만 알려진 바가 더 많다. 또 서예만이 아니라 그림도 그렸고 글씨나 그림의 품평(品評)에도 매우 뛰어났지만 아는 이가 드물다. 십년 전쯤 추사관련 책을 몇 권 산적이 있는데 그 중 한권의 책갈피 속에 글씨가 써 있는 옛날 원고지 한 장이 끼어 있었다. 언뜻 봐선 보통 글씨로 보이나 자세히 보니 예사 글씨가 아니고, 판심제(版心題)를 보니 바로 추사의 다른 호인 예당서(禮堂書)라 써 있지 않은가? 하여 추사의 젊었을 때 글씨가 아닐까 막연하게 생각하고 어디엔가 놓아두고 한참을 잊고 지내다, 근간에 다른 일로 책을 뒤지다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다. 본 김에 이리저리 다시 연구하다가 바로 이 종이가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29) 한석봉의 '석봉서' 3첩

    (29) 한석봉의 '석봉서' 3첩

    조선시대 3대 서예가 하면 보통 안평대군 이용(1418~1453), 석봉 한호(1543~1605), 추사 김정희(1786~1856)를 말한다. 누가 처음 이 말을 했는지는 모르나 조선시대에서 초기, 중기, 후기에 한 사람씩 제대로 평가한 것 같다. 또 시대마다 그 당대에 알맞은 글씨가 나오게 마련인데 이 세 사람은 그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글씨를 썼다. 안평은 조선 초기 왕권의 틀을 잡는 시기에 남들이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송설체를 써서 힘이 넘치고 우아하면서도 절도 있는 위엄을 보여줬다면, 한석봉은 조선의 기틀을 완성하고 내외적으로 복잡다난한 시기에 사자관(寫字官)으로서 외교문서를 비롯해 행정적인 글씨에 적합한 왕희지 계통의 둥글둥글하면서도 반듯한 요즈음의 인쇄체와 비슷한 글씨를 잘 써서 당시 국왕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28) 현재 심사정의 수묵산수

    (28) 현재 심사정의 수묵산수

    시대가 어려울수록 인물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시대의 아픔을 사람들의 지혜가 모여 이겨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려 할 때는 이런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 우리나라는 세종대왕 연간에 인물이 많았고 선조임금 시대에 특히 많았다. 그러나 예술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이는 노래나 그림이란 것이 여유가 있을 때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요즈음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말끝마다 삼원(三園)과 삼재(三齋)를 말한다. 삼원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1843-1897)을, 삼재는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 1707-1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27) 농암집 속의 위당선생 글씨

    (27) 농암집 속의 위당선생 글씨

    우연히 A고서점에 들려 이 책 저 책을 펼쳐보다 일제시대에 나온 농암 김창협(農巖 金昌協: 1651-1708)의 농암집을 보다가 주인에게 값을 물어보니 10만 원쯤 달라 한다. 20여 책 중에 제2책으로 내용권수로는 4,5,6권이 실려 있었다. 만약 그 안에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1950) 선생의 친필 글씨가 없었다면 고작해야 4, 5만원에도 살 리가 없겠지만, 나로서는 헐값에 사는 처지라 얼른 사가지고 나와, 펼쳐보고 읽어보고 오두방정을 다 떨어본다. 이 기분은 이런 일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느낄 수 없다. 아마도 서점주인은 누가 썼는지를 잘 몰랐겠지만, 글씨를 보는 순간 위당선생 글씨요, 내용은 시인데 위당의 문집 '담원문록()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26) 고사한거도(高士閑居圖)

    (26) 고사한거도(高士閑居圖)

    올해로 태어 난지 300년이 되는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은 여러 시점에서 두루 연구하여야 할 인물이다. 그가 태어나서 살아간 시기가 내적으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지나면서 혼란하고 어려웠던 상황을 극복하고 나라의 기강이 잡혀가고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우리 문화의 새로운 싹이 태동될 시기였다. 외적으로는 그 당시 새로 발돋움한 청나라가 강희라는 걸출한 황제가 나타나면서 이전까지의 중국 영토의 확장뿐만 아니라 문화까지도 저 당나라의 융성함 보다 뛰어난 정치, 문화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였다. 덩달아 조선에서는 연행(燕行)을 통해서 청나라의 그 유성한 문화가 유입되어 새로운 학문풍토와 문화예술이 골고루 발달하고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25) 농수정(籠水亭)

    (25) 농수정(籠水亭)

    고미술품을 만지다 보면 가끔은 팔고 싶지 않은 작품이 있다. 이런 작품은 가격이 많이 나가서가 아니고 나의 품성과 무언지 연관이 되기 때문일 것이나, 이 때문에 본의 아니게 좋은 관계의 단골손님과 사이가 벌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른 여러 작품과 함께 들어온 진경산수 농수정(籠水亭·사진) 그림이 나에게는 이런 작품이다. 조선후기에 오면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이라는 특출한 화가가 나와서 우리의 강산을 새롭게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를 일러 진경산수라 부른다. 이런 그림은 겸재 이후로는 겸재만큼 뛰어난 화가가 없었지만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여기 농수정(籠水亭)을 그린 진재 김윤겸(眞宰 金允謙: 1711-1775)이라는 화가도 겸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24) 전가진완(傳家珍玩)

    (24) 전가진완(傳家珍玩)

    1605년 강첨(姜籤: 1557-1611)은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황제 신종에게 붉은 비단 두필을 하사받는다. 이는 강첨이 입고 온 조복에 수놓은 흉배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황제가 누가 만든 흉배냐고 묻고, 며느리 김씨라고 대답하자 비단을 내리며 두 폭의 흉배를 부탁한 것이다. 이를 받아온 강첨은 며느리에게 주어 네 폭의 십장생 수를 놓게 하여 두 폭은 다음 해에 중국 황제에게 보내 드리고 나머지 두 폭은 집안에 대대로 전하는 보물로 삼았다. 며느리는 퇴계선생의 제자인 안동김씨 김충남(金忠男)의 따님이며 부군은 강첨의 큰아들 강학년(姜鶴年: 1585-1647)이다. 이 십장생 수(사진)는 무늬가 있는 고급 비단 두 폭으로 이루어 졌지만 연결되는 한 폭이다. 오른 쪽 자수에는 오른쪽부터 늙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23) 양교영매첩

    (23) 양교영매첩

    양교영매첩은 연안이씨 집안에 전해오는 매화서첩이다. 연안이씨 집안에는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1564-1635)가 명나라 말에 중국으로 사신 갔을 때 가지고 온 단엽 홍매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이름하여 월사매(月沙梅), 또는 대명매(大明梅)라 불린다. 이 매화는 창덕궁 안에 한 그루 심고 월사의 산소가 있는 가평 선영 앞에도 한 그루 서 있다. 집안에서 이 매화는 분재를 하거나 옮겨 심어서 여기저기 많이 전해지는데 필자도 묘목을 가져왔으나 잘 살려내지를 못해 현재는 기르고 있지 않다. 이 매화는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집안뿐만 아니라 많은 문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이야기의 중심에 있었다. 이 첩 또한 그 중 하나다. 어느 날 춘소 이연익(春沼 李淵翼: ?-1891)이 집안 형님인 송석 이교익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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