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사는 고모(85) 할머니는 2001년 막내아들 오모씨의 연대보증을 섰다. 오씨가 양계장을 운영하며 농협으로부터 사료 등을 구매하면서 발생한 채무 등에 대한 보증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양계장 운영은 여의치 않았고 오씨는 결국 경영난으로 1900여만원의 빚만 남긴채 양계장을 폐업한 뒤 2005년 일본에서 돈을 벌어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집을 떠났고, 연락마저 두절됐다.
오씨로부터 채무 변제를 받지 못한 농협은 2016년 3월 연대보증인인 고 할머니를 상대로 보증채무금소송(2016가소5200)을 제기했다. 소송을 당한 고 할머니는 발만 동동 구르다 지인의 도움으로 법률구조공단을 찾았다. 공단은 오씨와 농협간 거래는 상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상사소멸시효 5년이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5년의 상사소멸시효가 적용되면 오씨의 채무는 이미 2006년 4월 소멸한 것으로 봐야 했다. 하지만 1심은 농협의 손을 들어줬다. 농업협동조합법에 의해 설립된 조합은 조합원인 농민들이 생산한 물자를 판매하는 등의 사업을 하는 기관으로 농민들에 대한 생산자금 지원이나 사료 등을 빌려주는데 이는 상행위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오씨의 상인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1심부터 고 할머니를 대리한 법률구조공단 김성현(38·36기) 변호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항소심에서 '농협은 상인이 아니지만, 오씨가 상인에 해당한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 오씨가 농협에 부담하게 된 채무는 양계장 영업을 위한 사료의 구매대금 등이라는 점과 오씨가 양계장을 운영하기 위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토지를 대규모로 임차해 계사를 신축하고 산란종 5000여 마리를 사육해 왔으며, 계란 유통업자 등과도 지속적으로 거래해 왔다는 관계자들의 진술을 적극적으로 확보해 증거자료로 제출한 것이다.
김 변호사는 오씨가 이처럼 양계장업을 운영한 것은 상법 제5조 '설비에 의하여 상인적 방법으로 영업을 하는 것'에 해당해 의제상인으로 볼 수 있고, 의제상인이 영업을 위해 농협으로부터 사료 등 자재를 구입하는 행위는 상법 제47조의 '보조적 상행위'에 해당하므로 농협의 사료 외상대금 등 채권에는 상사소멸시효 5년이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승소 판결을 이끌어 냈다.
제주지법 민사5부(재판장 서현석 부장판사)는 최근 오씨와 농협의 거래를 상행위로 인정한 뒤 "외상거래약정 만료일로부터 5년이 경과한 후 보증채무금 소송이 제기됐으므로 보증채무의 부종성에 따라 고 할머니에 대한 농협의 연대보증채권 역시 5년의 상사시효가 적용된다"며 원고패소 판결했다(2016나1113).
법률구조공단 관계자는 "고령의 의뢰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의 빚을 떠안게 될 우려가 있는 상황에서 날카로운 법해석에 근거한 적극적인 시효완성 주장을 통해 승소한 사례"라며 "상인 개념의 적확한 해석과 확장을 통해 법률과 현실의 지체현상을 해소한 의미있는 사건"이라고 설명했다.